[편집자 레터] 출판계 낯선 손님 ‘연출자’‘라이팅 디자이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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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연극에서 주로 쓰는 ‘연출’개념이 도입된 첫 책은 지난주 출간된 자기계발서 『파블로 이야기』(한국경제신문)입니다. 책 표지 저자와 역자 이름 옆에는 ‘고도원 연출’이란 문구가 선명합니다. 출판사 쪽에 ‘연출’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파블로 …』는 원래 소설이었답니다. 소설을 자기계발서로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했겠지요. “원서를 번역한 뒤 ‘고도원의 아침편지’ 운영자인 고도원씨를 만나 원고를 보여줬고, 흔쾌히 응한 고씨가 전체 원고를 윤문하고 ‘파블로의 메시지’부분을 추가해줬다”는 것이 출판사의 설명입니다. 고씨의 역할은 더 이어집니다. 동영상 강의 CD를 만들어 ‘부록’ 형식으로 책에 붙였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관련 강연을 한다고 합니다. ‘연출자’는 “책의 메시지를 종이책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프라인으로 확산시키는 ‘프로듀싱(producing)’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제작의 모든 관리를 책임지는 일’을 뜻하는 ‘프로듀싱’이 책 선정과 번역이 모두 끝난 뒤 합류한 그에게 과연 적절한 단어인지는, 여전히 논란 거리입니다.

한편 ‘디자인’은 대필 논란까지 불거졌던 『박경림의 사람』(리더스북)에 등장한 단어입니다. 표지 뒤쪽에 적힌 ‘Writing Design by 박경민’이란 문구가 생소했지요. ‘라이팅 디자이너’를 맡은 박경민은 책 에필로그에서 “그녀(박경림)의 이야기에 곡을 붙였다”고 표현했습니다. 박경림이 써온 1차 원고를 읽은 뒤 박경림을 인터뷰했고, 그 인터뷰를 토대로 글을 덧붙이고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출판사 역시 “책의 모든 아이디어는 박경림으로부터 왔지만, 박경림이 작가가 아닌 이상 책은 전문 작가가 쓰는 것이 바람직한 역할 분담”이라고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굳이 ‘라이팅 디자이너’란 새 직업까지 만들어야 했을까요.

마침 이번주 번역돼 나온 화제작 『마지막 강의』(살림)에는 저자가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주인공 랜디 포시 교수이고, 또 한 명은 칼럼니스트 제프리 재슬로이지요. 애써 유명인 한 명만 단독 저자로 내세우며 ‘순도(純度)’를 높이려 하지 않아도 좋은 콘텐트는 알아보리라, 독자를 믿어보면 안될는지요.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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