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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 하기 나름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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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총선이 열흘 남았다.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된 뒤 나라 안팎에서 만난 외국인들은 마치 인사치레하듯 한국의 정국에 대해 물었다. 질문은 우리가 나누는 얘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통령이 정말 물러나는 것이냐" "총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당이 총선에서 압승하면 한국의 정치판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등등 예상했던 의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장래를 충심으로 걱정하고 우려해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은 돌아온다." "대통령이 입당은 안 했지만 여당이라고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이 크게 약진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제1당이었던 한나라당은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것보다는 양당의 격차가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다시 살아난 대통령과 제1당으로 등장할 여당의 조합이 한국사회의 안정을 보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판의 그런 조화 밑에서 국민은 한동안 불편한 마음가짐으로 지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개혁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탄핵 정국과 총선 결과가 결국 내 생각처럼 된다면 적지 않은 불편이 따르겠지만 한국의 장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답변한 셈이다. 사실 탄핵과 총선이 어우러진 현재의 우리 사회가 답답한 에피소드로 가득 찬 것 같지만 한달 정도 지나고 나면 많은 국민은 "왜 그때 우리는 그토록 어지러운 시절을 보냈던가"라며 일상생활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엄청난 경험을 겪고 나서 과연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하는 데 있다.

내 예상대로 된다면 입법부의 구성이 변하는 것 말고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 새로운 얼굴이 많이 등장한 국회가 되겠지만 정당은 몇몇 지도부 인사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붕당(朋黨)의 면모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념정당이 없다시피한 우리 정치판에 총선이 끝나면 또다시 철새들의 이동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총선에서 정책을 보고 찍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각 당의 정책들이 크게 다를 바 없거니와 심사숙고 끝에 나온 구상도 아니다. 더욱이 공약 준수 의지도 의심스럽고 유권자들조차 각 당의 공약 이행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심판할 의사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당 이념이나 철학과 무관하게 표의 득실을 따져 정책을 남발하는 현실이나 정치적 실언(失言)을 만회한답시고 급조된 대책을 내놓는 식의 득표 행태를 보이는 마당에 정책만을 믿고 표를 준다는 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다.

외국인들은 다시 묻는다.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면 왜 이런 혼란을 자초했는가."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탄핵에서 살아난 대통령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게다가 다수당이 된 여당의 지지까지 한몸에 안은 대통령을 견제할 장치는 사라지는 꼴이 되겠구나." 결국 이번의 혼란을 통해 의회민주주의가 조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면 대통령과 국회 간에 견제와 균형이 이뤄질 수 있는 장치만큼은 마련돼야 한다는 데로 생각이 모인다. 대통령의 개혁의지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좋고, 탄핵을 기도했던 이들을 심판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독주(獨走)에 제동을 가할 수 있는 정도의 제도적 견제장치는 있어야 한다. 그것 말고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에 근접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외국인들은 또다시 묻는다. "총선과 탄핵 정국이 끝나고 나면 한국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되느냐." 결국 우리 하기 나름이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