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북핵 투명성 提高 계기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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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공급범위와 상환조건 등을 둘러싸고 지루하게 끌어오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간의 경수로(輕水爐)공급협정이 마침내 체결됐다.
북한측은 한푼도 안들이고 경수로를 건설하는 것은 물론 송배전시설.항만시설 개선 등 부대이익을 확보하려는 입장에서 한발짝 물러섰고,KEDO측은 경수로 원전건설의 통상적인 국제관례에 덧붙여 모의훈련장치 제공,3년 거치 17년 무이자 분할상환 등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합의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북한측의 실용주의적 협상자세가 합의에 이를 수 있게된 관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동안 북한은 남한이 경수로사업을계기로 대북(對北)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경계해 왔다.그러나 최근 대미(對美)관계 개선에 외교적 노력을 집중해오고 있는 북한으로선 공급협정 타결이 대미.일(對美.日)관계 개선의 촉진및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경제적 실익,원자력 분야의 발전,개방정책의 분위기 조성 등 체제유지를 위한 포괄적인 이익을 갖다 줄 것으로 판 단한 것 같다.
특히 김정일(金正日)은 이번 경수로협상을 통해 정책적 성과를거둠으로써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핵무기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켰던 북한 핵문제는 지난해 10월 북-미(北-美)제네바 합의를 시작으로 이제 경수로 공급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구체적인 해결단계로진입할 수 있게 됐다.경수로 공급협정의 체결에 따라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시설에 대한 임시.일반사찰 재개,안전조치의 전면적 이행 등 핵활동과 관련한 의무사항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이에 따라 북한 핵투명성의 확보가 보다 가능해질 것이다.
이밖에 한국은 이번 공급협상을 통해 몇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첫째,경수로사업의 핵심적 원칙인 한국표준형원자로의 공급과 한국의 중심적 역할수행이 보다 명백히 확인됐다.둘째,KEDO와 북한이 협정당사자로 공급협정이 국제조약적 성격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을 국제사회의 규범에 보다 적응시킬 수 있게 됐다.셋째,사업진행의 측면에서 사업자간 접촉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양자차원의 보장이 포함됨으로써남북한이 직접 협력할 수 있는 계 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경수로 공급협정 체결로 북한 핵문제와 관련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앞으로도 법적 지위.영사보호.상환일정.공급일정 등 공급협정 이행을 위한 시행세칙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정분담및 조달방법과 관련해 한.미.일간에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들 3국간 긴밀한 공조가 더욱 요청된다.
이와 관련,우리의 분담규모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북한의 과거 핵활동 의혹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또한 경수로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미및 북-일(北-日)관계가 개선되는 가운데 남북대화가 진전되지 않는다면 한국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북한의 합의에 대한 실천이 전제돼야 함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경수로사업을 북한의 핵투명성 제고(提高)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계기로 만든다는 기본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경수로사업이 가능한 한 정치적 색채를 띠지 않고 경제.과학.기술적 측면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남북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경수로사업에 차질이 초래된다면경수로사업이 남북관계 개선을 촉진시키기보다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대북경수로공급은 우리에게 민족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을 점검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통일硏 정책연구실장)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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