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역사 바로세우기'의節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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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12.12 담화문을 접하면서 새삼 느끼는 아쉬움과 의문은 왜 이런 담화가 진작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노태우(盧泰愚)씨 비자금수사 초기에 이번과 같은 담화가 나왔더라면 국민은 대통령의 「비장한 각오와 의지」에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지지도 한결확고해졌을 것이다.
담화는 이미 많은 사람이 12.12나 5.18에 관한 일련의정책결정이 단순히 「역사 바로 세우기」만 위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다가오는 총선과 정적(政敵)도 함께 겨냥한 「일타삼매(一打三枚)」의 정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깊이 빠 져든 뒤에야 나왔다.때문에 자신의 참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열정적으로 밝히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강한 호소력이나 신선감은 주지 못하고 있다. 경제만 압축성장한게 아니라 격변에 격변이 거듭하는 험난한정치사를 체험해오면서 국민의 정치의식과 법의식도 압축성장했다.
이제 국민은 목표의 정당성 뿐만 아니라 그 목표를 이룩하기 위한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성도 함께 요구하고 있다.아 무리 결과적으로 박수받을 결단이어도 그것이 독단적인 것이거나 절차에 흠이 있을 때는 즉각 마음 한구석에서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더구나 그것에 어떤 복선이 깔려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가질 때 그심리적 저항감은 반감으로 표면화하기도 한다.
金대통령은 담화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는 단순한 과거 정리작업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창조의 대업이며 이 과업이 완수되려면…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金대통령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지만 요구한다고 해서,단지 목표가 옳다고 해서절로 하나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대통령부터 시민담론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숨김없이 가슴속을 털어내놓고 동의와 지지를 구해야 하나가 될 수 있다.
「박수소리는 높은데 대통령의 인기는 그다지 올라가지 않는다」는게 항간에 나도는 말이다.얼마나 정확한 말인지는 몰라도 이런말이 나도는 것 자체가 경종(警鐘)은 될 것이다.또 언제 어떤폭탄선언이 나올지 모르는 불가(不可)예측성,한 꺼번에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과잉의욕,서둘러 모든 것을 끝내려는 조급성….이런 것들이 목표에는 적극 찬동하는 다수 국민마저 반발세력 앞에서 말이 궁한 사람이 되게 하고 있다.
담화는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더니 왜 갑작스럽게 단죄에 나섰느냐에 대한 대답은 되지만 의문과 불투명성을 모두 밝혀주지는못했다.이제 시작인가 싶었는데 연내에 모든 것을 마무리지으려는듯한 움직임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가 목표라면서 진실규명보다도 전두환(全斗煥).盧씨등 몇몇 사람의 인적 청산에 초점을 맞춘듯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대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또 대선자금과 관련된 의혹부터 밝히는게 순서고 그래야 스스로 떳떳할텐데 이를 뒤로 돌리고있는 것도 얼른 이해가 안된다.
「역사 바로 세우기」가 성공하길 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金대통령이 이쯤에서 표적을 단순화하길 바라고 있다.3金시대의 탈피,지역구도의 타파등에도 공감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국민의 선택에 맡겨둬야 한다.5.18의 진실규명 하 나만 해도 거창한 작업이다.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완결짓는다면 시대청산의 물줄기는 자연스레 형성될 것이다.
5.18문제의 선결 과제는 완벽한 진상규명이다.단죄는 그 다음 순서다.단죄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정할 것도 없다.진실이 규명되면 미리 지목하지 않더라도 그 대상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5.18은 지명(指名)단죄로 끝내기에는 너무도 역사적인 사건이며 따라서 진실규명이 불충분한채 이뤄지는 단죄는 5.18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또다시 숙제를 남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기한을 정해놓고 해치우듯 서두를 것도 없다.워터게이트사건수사도 2년이 걸렸다.국민이 심란해하고 분위기 전환을 원하는 것은 대충 하자는게 아니라 일 처리가 너무 종잡기 어렵고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천천히,그러나 착실히」는 건설공 사에서만 요구되는건 아니다.「역사 바로 세우기」도 그래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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