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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 없는 실용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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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쪽으로 눕자니 저쪽이 걸리고 저쪽으로 눕자니 이쪽이 걸린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말이다. 며칠 전 열린 2008년 총영사회의에서 “우리처럼 4강(强)에 둘러싸여 국경을 마주하거나 옆에 있는 나라가 세계에 어디에 있느냐”며 한 말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적인 외교를 해야 하는 고충을 토로한 말로 보이지만, 외교장관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4강에 포위된 지정학적 상황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는 우리의 운명 같은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외교가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하라고 사람을 골라 외교장관에 앉힌 것이다. 그런데 외교장관이 공개석상에서 ‘신세 타령’을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 동맹의 복원을 최우선 외교과제로 삼았다. “반미(反美) 좀 하면 어때”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감상적 자주론자의 난폭운전으로 고장 난 한·미 동맹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워싱턴에 가기 위해서는 베이징에 대한 전략적 배려가 동시에 있었어야 한다.

이 정부 들어 한국이 워싱턴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는 데 대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베이징에 대한 나름의 대책을 세워놓고 워싱턴으로 가는 것이 외교의 상식일 텐데 과연 그랬는지 의문이다. 한국 대통령이 국빈(國賓)으로 중국을 방문 중인 상황에서 “한·미 군사동맹은 지나간 역사의 산물이며,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기 어렵다”는 무례한 발언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입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손님을 불러놓고 뒤통수를 친 격이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적 체모(體貌)의 손상을 무릅쓰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사실상의 재협상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왔다. 이 사태를 초래한 부실·졸속 협상의 책임에서 외교부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근본적 책임이 외교부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과 쇠고기 협상, 이 대통령의 방미 시기 등의 상관관계를 면밀하게 따져 협상 시기와 타결 수준 등을 정하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일차적 책임이 외교부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북핵 문제에서 국제문제까지 한·미 공조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한·미 동맹이 한국 외교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법의 열쇠는 아니다. 자칫 사대외교·추종외교 논란을 빚으면서 동북아 외교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도 있다. 4강의 틈바구니에서 한국 외교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국 남북관계에서 지렛대를 찾는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가 6자회담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남북관계가 받쳐줬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얼어붙어 있는 상태에서 한국 외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을 하면 적극 지원하겠다는 ‘비핵·개방 3000’ 구상으로 대북정책에서 스스로 발목을 묶어버렸다. 북한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차단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실용외교와는 거리가 멀다. ‘노무현 정부가 한 것은 무조건 안 한다’는 옹졸한 발상도 한심한 도그마이기는 마찬가지다.

말로는 실용을 외치면서도 이념 아닌 이념의 포로가 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실용외교 100일의 현주소다. “열심히 일해왔지만 외교부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싸늘한 것 같다”고 유 장관이 말한 걸 보면 외교부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아는 모양이다. 이명박 정부는 우리의 운명을 탓할 게 아니라 제 발을 묶고 있는 도그마의 족쇄부터 풀어야 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