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권력距離와 '원숭이 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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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인도네시아 발리섬에 있는 관광명소 「원숭이 숲」의 국민인 원숭이와 사람은 같은 영장목(靈長目)에 속한다는 점에서 진화론적형제간이다.제 눈속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 눈속 티끌은 잘도 본다는 말과는 달리 원숭이 눈속의 티끌에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상처와 수치(羞恥)를 본다.
이 숲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관광객이거나,관광객에게 물건도 팔고 사진도 찍어 주는 상인이다.그 곳 원숭이들은 관광객의 소지품을 환한 대낮에 날치기하는 도둑질로 생업을 삼고 있다.높은 나뭇가지 위로 도망가서 채 간 물건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원 주인은 가까이 늘 따라 다니는 상인에게서 먹을 것을 빨리 사서 원숭이에게 교환하자는 교섭을 건다.대체로 이 교환은 성공한다고 한다.도둑질을 단서(端緖)로 삼아 원숭이는 먹이를 얻고사람은 두고두고 화제로 삼을 관광 경험을 얻는다.원숭이에게 도둑질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가르칠 까닭은 없다.이 숲에는 허물어진 힌두교 사당들이 적지않다.원숭이는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천국이자 지옥이다.
이 곳에서 가장 구경할 만한 것은 정치다.미셸 푸코는 권력은그 사회의 성(性)을 억제시킴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지만 원숭이 나라의 주권은 한 마리의 남성 왕이 원하는 숫자만큼 여성을 독차지함으로써 생긴다.현재의 왕과 한판 결투를 벌 여 이긴 놈이나오면 언제든지 새 왕에 등극한다.모든 왕비는 새 왕이 차지한다. 새 왕 주위에는 지난 한 때 왕위에 있었던 늙은 원숭이들이 폭력의 소재처였던 훌륭한 몸집을 꾸부정 하게 수그리고 여기저기 앉아 있다.여태까지 한번도 복위(復位)쿠데타가 일어난 것을 본 일이 없다고 나이든 안내자가 설명했다.그들은 많은 암컷에게 자기의 씨를 배게 했을 것이다.돌연변이라는 역성(易姓)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새 왕이 될만한 튼튼한 젊은 원숭이는 전왕의 아들.형제.조카 가운데서 나올 수밖에 없다.씨는 속일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지난 15일 서울에서 네덜란드 림부르크대학의 조직인류학.국제경영학교수 기어트 홉스테드박사가 「국가문화.조직문화,그리고 경영혁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나는 이 강연과 그의 저서『세계의 문화와 조직(1995.학지사)』이 급격 한 정보화.개방화라는 생존환경 변화에 처한 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전략을세우는데 요긴한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홉스테드 교수에의하면 한 나라의 구성원이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는심리적인 「권력거리(power distance)」가 한국사회에서는 미국사회보다는 멀지만 프랑스사회보다 가까운 것으로 측정돼있다.권력에 대해 어지간히 민주적이고 평등한 심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숫자는 직장에서 잰 값이다.
발리섬의 원숭이 숲 나라에서도 왕 한 마리를 빼 놓으면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날치기 원숭이 사이의 권력거리는 아마도 미국사회의 그것보다도 더 가까울 것이다.한국이 평등사회됨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은 지금과 같은 대통령의 존재다.국 민 직접선거를거쳐 뽑힌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차지한 것」이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全斗煥)씨에 못지 않았길래 그는 옥속에 지금 갇혀 있다.
우리나라의 「공명」선거는 원숭이 나라의 왕위 차지하기 결투와차라리 비슷한 것이라서 그럴까.아무튼 노태우씨의 부패는 사람의부패가 아닌 제도의 부패다.역시 공정한 선거를 통해 당선된 김영삼(金泳三)대통령마저 잠재적 의심을 받고 있 는 것은 그도 제도적.문화적으로 국민에게서 너무 먼 권력거리 밖에서 가리운 채(반드시 돈이 아니더라도)「차지하고 있는」것이 너무 많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이 점이 우리 대통령의 근본적인 곤란이다.
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씨도 대통령이 되면 같을 것이다. 각급 정치적 입후보자의 정당공천 절차의 철저한 민주화,내각책임제 개헌 등 권력거리 축소를 위한 제도가 있으면 모두 연구해 볼 때다.강력한 폐쇄권력시스템 내부는 개방하지 않으면 무질서와 부패를 나타내는 엔트로피 수치(數値)가 증가하 는 것을 막지 못한다.원숭이 나라와는 달리 사람의 나라에서는 정치권력을폐쇄시켜 둔채 경제만 개방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논설고문) 강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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