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얼굴에 구멍난 양말 … ‘사우나 정치’ 아지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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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 18면

나경원 의원이 지난달 30일 국회 여성 건강관리실에서 운동하고 있다.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지하 2층에는 여성 의원만 출입이 가능한 ‘건강관리실’이 있다. 사실상 유일한 여성 의원만의 공간이다. 이미경·조배숙·나경원·진수희·전여옥 의원 등이 단골이다. 러닝머신 세 대와 간단한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가 놓인 운동 공간과 간이 침대가 두 개 놓인 수면실이 있다.

여성 의원만을 위한 유일한 공간 ‘건강관리실’

서너 명이 동시에 들어갈 만한 냉·온탕과 샤워시설도 갖췄다. 한쪽엔 화장대 하나가 놓인 미니 미용실도 있다. 이곳 역시 여성 의원만 머리를 손질하는 곳이다. 가격은 저렴해 파마는 2만원, 드라이를 이용해 머리를 매만져주는 데는 6000원이다. 운동 시설이나 욕탕은 공짜다.

이 공간이 마련된 것은 17대 국회가 시작된 2004년. 2001년부터 여성 의원이 “국회에 여성 목욕탕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여성 의원이 옷을 벗고 남성 의원 사우나를 점령하겠다”며 투쟁한 끝에 얻은 결실이다. 의원들은 이곳에서 전문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스트레칭과 달리기·근육운동 등을 한다. 여성 트레이너들이 꼽는 운동 매니어는 민주당 이미경 의원. 이 의원은 매일 오전 6시 이곳을 찾는다.

트레이너인 김태형(33·여)씨가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한 것이 이 의원이 4선까지 한 비결 중 하나”라고 말할 정도다. 미용실을 애용하는 의원도 많다.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대변인 시절 각종 공식적인 모임과 행사가 많았는데 이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다”고 소개했다.

41명의 여성 의원 이름표가 붙어 있는 라커 룸./서너 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냉온탕./건강관리실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모습. 조배숙 의원(오른쪽)이 트레이너의 설명을 듣고 있다. 신동연 기자

건강관리실은 전직 의원이나 여성 보좌관·비서관들에겐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한 직원은 “여성 의원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여성 의원은 이곳에서만큼은 맨 얼굴에 구멍 난 양말을 신는 등 ‘일반 아줌마’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모 의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운동을 하다 러닝머신에서 굴러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남성 의원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사우나 정치’도 자연스레 이뤄진다. 한 담당자는 “TV에서 보면 서로 싸우던 의원들이 여기만 오면 고민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된다”며 “국감이 있을 때는 의원들 사이에서 왠지 모를 냉기류가 흐르다가도 막상 상대 당 의원들이 안 보이면 ‘왜 안 오느냐’며 궁금해한다”고 전했다. 18대 총선에서 탈락한 한 전직 초선 의원은 “여기를 못 다니는 게 제일 아쉽다”고 할 정도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지하 주차장 옆에 건강관리실을 마련하자 이런 곳에 여성 의원을 위한 휴식 공간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일반 남성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온 뒤로는 건강관리실 입구는 유리문을 잠가 두고 벨을 누르면 안에서 문을 열어준다. 18대 국회에 여성 의원이 41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이곳은 최근 작은 공사를 했다. 2단 캐비닛 아랫부분을 두 칸씩으로 나눠 사용 인원을 늘렸다.

한나라당 박순자 의원은 “여성 의원끼리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만나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장소는 건강관리실뿐”이라며 “여성 의원은 정보와 네트워킹에 있어 남성 의원보다 뒤지는데, 여성 의원끼리 정당에 관계없이 공동의 목소리를 내거나 공익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오픈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복지 제도에서 여성 의원은 출산·결혼을 하면 국회 정무직 공무원과 같은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임기 내 결혼할 경우 화환이나 10만원 상당의 축의금을 받으며 출산휴가는 90일까지 쓸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현직 여성 국회의원이 아기를 낳고 출산휴가를 받은 경우는 없다. 초등학생 미만의 어린 자녀가 있을 경우엔 국회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돌봐준다.

막상 이 제도의 혜택을 본 사람은 남성인 김명주 전 한나라당 의원이다. 김 전 의원은 17대 임기 동안 셋째, 넷째 아이를 여기에 맡겼다. 그는 “출근할 때 아이를 데려와 맡긴 뒤 퇴근할 때 함께 갈 수 있어 편했다”고 귀띔했다.
여성 의원은 아직도 국회 공간이 여성에겐 불편한 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민주당 조배숙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 안에 여성 의원 전용 화장실이 있는데 손가방을 둘 선반조차 없는 등 남성의 시각으로 설계돼 있었다”며 “지난해에야 겨우 작은 선반이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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