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APEC 안보기구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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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달여동안 국내 문제로 나라 전체가 다른 일엔 손놓고 지냈다.89년 아태경제협력체(APEC)창설을 포함해 외교분야에서 큰업적을 남겼다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
국내 사태로 인한 곤혹감에도 불구하고 오사카(大阪)APEC회의에 참석한 우리 대표단은 우려했던 농업부문의 개방일정에 「신축성」을 유도해냈으나 이번 회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지난해 보고르회담에서 도출한 원칙의 이행 지 침을 마련하는 후속회담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기 때문일 것이다.미국 클린턴대통령이 국내 문제로 불참한 것도 이유일지 모른다.
오사카회의에서는 회원국간의 결속보다 오히려 다양성이 부각됐다.정상회의에서 발표된 공동선언에 언급된 「신축성」은 APEC 회원국들간의 다양성과 견해차이를 모양좋게 표현한 외교수사일 뿐이다.향후 이행과정에서 APEC의 기본정신인 「포 괄성」원칙과의 상충속에 많은 논란을 예고한다.
국민총생산 4조2,000억달러가 넘는 일본과 390억달러에 불과한 파푸아뉴기니,인구 12억의 중국과 300만 인구의 싱가포르,지하자원이 풍부한 호주와 달리 인적 자원만이 넘치는 일본등이 모두 APEC의 회원국이다.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세계총생산 60%와 세계무역 46%를 차지하는 아태지역의 장래에 무역이 중요하다는 인식일 뿐이라 할 정도다.
공감대보다 다양성이 두드러진 이번 APEC회의를 치르며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탈냉전시대 정치경제의 추이는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APEC의 장래와 관련해군사력에 있어 유일 초강대국이면서도 경제력의 상 대적 침체를 보이는 미국의 아태정책에 회원국 모두가 주목하는 근원적 이유도여기에 있다.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수출 30%이상을 미국이 흡수하고는 있지만 아시아국가들간의 무역과 투자증대는 미국시장에 대한 이들의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지역국들간의 무역은 아시아지역 총교역량 50%에 근접하고 있으며,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의 대외투자 절반가량이 아시아지역에서 이뤄진다.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 아시아국가들은 대미(對美)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 국가들은 국가간 정치.경제적 이익의 충돌에서야기될 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으며 한동안 역내(域內) 군사적 안전보장자의 역할은 미국만이 할 수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다.일본은 미국의 안보공약에 무임승차한 채 660 억달러의 대미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고,중국은 대만및 인권문제 등으로 미국과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올해말까지 330억달러의 대미흑자를 낼 것이라 한다.동아시아지역 질서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정책이 대중.일(對 中.日) 경제관계와 무관할수 없음을 예측케 하는 경제수치들이다.
미국은 역내 미군주둔이 한국뿐만 아니라 중.일의 전략적 이익과도 맞아떨어진다는 판단아래 10여만 주둔군에 기초한 개입정책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에서의 안보역할을 대가로 APEC과 병행한 쌍무적 차원의 통상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예상은 근거있다.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군사현대화,일본의 군사적 잠재력과 장래 미국의 군사적 역할의 불확실성 등은 동아시아지역 세력균형의변화를 수반할 것이다.APEC을 통한 경제적 상호의존이 군사적분쟁을 억지할 것이라는 기대는 성급하다.페리 미국 국방장관이 APEC안에서의 안보분야 논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중.일과의 군사교류를 통한 신뢰구축을 때맞춰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APEC회의는 미국.중국.일본,세나라간의 안보 및 경제관계를 포괄적으로 관측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본사 전문위원.政博) 길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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