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일본은 왜 당한것만 부각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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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지난 14일 일본의 거듭된 망언에 대해 『이번에는 기어이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표현했다.
외교적 언사로는 문제가 있었다.그래서 청와대측도 대통령 발언직후 「버르장머리」를 취소하고 대신 「태도」로 표현을 바꾸었다.이 과정은 일본의 신문들에도 상세히 소개되었다.
16일 오후 일본의 노사카 고켄(野坂浩賢)관방장관은 『발언을정정했기 때문에 공식언사가 아니라고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다』며 『金대통령은 절도있는 발언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꼬집었다.정부대변인이기도 한 관방장관이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비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표현 자체에 대한 일본 조야의 불쾌감이 깊다는 증거일것이다.일본 신문들은 『버르장머리라는 말은 노인이 손자를 꾸짖을 때나 쓰는 낮은 표현』이라는 해설까지 달았다.
「일단 사과를 했으면 흔쾌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로서는 망언의 주인공 에토 다카미(江藤隆美)장관이 사임까지 한 마당에 또다시 거친 표현을 당했다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그러나 「버르장머리」라는 속된 표현 속에는 반복되는 망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응축된 분노가 짙게 투영돼 있다는 점을 일본은직시해야 한다.
한국인들이 애써 잊을만 하면 일본 정치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망언을 거듭했다.
이에 대해 일본이 진정한 반성과 성찰을 한 후였다면 『절도있는 발언』 운운한 관방장관의 지적이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일본이 언제 한번 한일합병조약과 일제강점에 대해 절도있는 반성을한 적이 있는가.문제의 본령을 잊고 말투에 대한 시비로 뒤바꾸려는 태도는 사태를 더 그르칠 우려가 있다.
독일의 한 신문이 주일미군의 성폭행 사건은 참지 못하면서 7만여명에 달했던 한국인 종군위안부 문제는 외면하는 일본의 태도를 통렬히 비판한 점을 일본인들은 새겨야 한다.
히로시마(廣島)원폭투하의 비극만 광고하는 일본에 대해 다른 아시아인들은 그 비극에 대한 동정보다 일본 자신의 죄업을 감추려는 태도에 분노한다는 점을 알아야할 것이다.
도쿄=노재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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