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코스모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진경(1953~)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속엔
유랑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맣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송이
팽그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지난해 늦가을과 초겨울에 내가 제일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코스모스 씨앗을 세 봉지나 받아둔 일이다. 봉지 속의 씨앗을 다 풀어내면 한 됫박은 좋이 될 것이다. 863번 지방도로(이 길을 곧장 가면 여수 바다에 이른다)와 순천만 갈대밭 주위에 핀 코스모스 씨앗들을 틈나는 대로 받았다. 코스모스 씨앗을 열심히 받고 있노라면 마음 안에 유랑극단의 나팔소리가 들린다. 물맑은 샘물이 찰랑거리기도 하고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봄이 된 지금 나는 그 씨앗들을 어디에 뿌릴까 하는 마음으로 기쁘다.

곽재구<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