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내달부터 ‘환경 출입증’ … 한국은 무대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펄프와 제지·수처리·코팅 사업을 하는 핀란드 케미라(Kemira)는 2월 리치(REACH) 사전등록 준비를 마쳤다. 독일의 글로벌 화학회사인 바스프는 2003년부터 자체 연구개발을 통해 리치 정책을 입안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럽 주요 기업들은 다음 달 1일 리치 시행을 앞두고 일찌감치 화학물질 파악 시스템을 도입한다든지, 전문인력을 양성한다든지 준비를 철저히 해왔다. 리치가 유럽연합(EU) 내에서 비즈니스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할 강력한 국제환경규제인 만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하지만 국내 업계는 너무 태평하다는 느낌이다. 리치에 등록하지 않으면 EU 수출이 막힐 수 있는데도 우리 수출업체들은 ‘EU 시장 출입증’이나 마찬가지인 리치에 무방비 상태다.

KOTRA에 따르면 EU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 열에 아홉은 리치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 KOTRA의 리치 기업지원센터(www.reach.or.kr)가 2월 리치 등록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592개 업체를 조사한 결과 90.5%는 ‘리치 관련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나머지 응답도 컨설팅회사와 막 계약했거나, 조심할 화학물질이 무언지 파악하는 단계에 머물렀다.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5%를 점하는 EU 시장에서 국내 기업이 퇴출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농산물을 제외한 모든 수출품목은 화학물질이 거의 들어가게 마련이다. 예컨대 청바지나 지우개, 플라스틱 용기 등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제품은 화학물질로 이뤄져 있다. 지식경제부 추정으론 지난해 현재 규제 대상 화학물질을 함유해 EU에 사전 등록해야 하는 제품의 EU 수출액은 적어도 21억 달러에 달했다.

KOTRA의 정철 구미팀장은 “리치 등록에는 해당 물질 분석에 상당한 시간과 인력·비용이 든다. 서둘러 등록 준비를 해야 비용을 줄이고, 나중에 판로가 막히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EU 회원국이 아닌 국적의 제조업체는 직접 등록할 수 없고, EU 내 수입업자나 대리인을 통해서 등록할 수 있다.

안혜리 기자

◇REACH(Registration Evaluation Authorisation and Restriction of Chemicals)란=EU에서 연간 1t 이상 제조 또는 수입되는 기존 화학물질에 대해 등록하도록 하는 신화학물질 관리제도. 순수한 화학물질뿐 아니라 혼합물이나 완제품에 사용된 화학물질도 포함된다. 1981년 9월 18일 이전 출시한 화학물질은 6~11월 사전 등록할 수 있다. 그 이후 출시 화학물질은 바로 등록해야 한다. 연간 100t 이상의 물질과 위해성이 큰 물질을 우선 평가하며, 특정 물질은 허가받아야 한다. 또 일부 물질은 사용할 수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