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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항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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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래는 시대의 메아리다. 계몽기 가요들은 우리 인민에게 깊은 감흥을 안겨주고 있다.”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2월 12일자 기사의 일부다. ‘계몽기 가요’는 해방 전 유행가요를 일컫는 북한식 표현이다.

‘계몽기 가요’ 가운데 북한에서 일찌감치 좋은 평가를 받은 곡으로는 ‘황성옛터’를 들 수 있다. 작곡가 전수린이 1928년 순회공연차 개성에 들렀다가 고려 궁궐터인 만월대가 옛 시절의 부귀영화는 온데간데없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만든 곡이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로 시작되는 애절한 가사와 구슬픈 곡조는 일제에 나라를 뺏긴 망국의 설움과 겹쳐 공연 때마다 객석이 눈물바다가 될 정도였다고 전한다. 반일감정의 확산을 우려한 일제는 결국 금곡령(禁曲令)을 내리기에 이른다.

북한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최창호 지음)는 ‘황성옛터’를 예로 들며 “민족 수난기에 창작된 대부분의 비가(悲歌)들은 민족 감성을 반영한 것으로 외세 강점하에서도 애국적 감정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목포의 눈물’ 등도 비슷한 이유로 북한에선 높이 평가받고 있는 곡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반동적·퇴폐적이란 낙인과 함께 배척의 대상이다. 그런데 지난 21일 조선중앙방송에는 다소 뜻밖의 노래인 ‘대지의 항구’가 보천보 전자악단의 경쾌한 연주로 흘러나왔다.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느냐”란 서주 부분만 들려주면 한국에선 남녀노소 누구나 금세 따라 부를 정도로 익숙한 곡이다.

이 노래는 1940년에 제작된 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가로 백년설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다. 하지만 한국의 가요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곱지 않다. 노래 가사만 봐선 잘 알 수 없지만 ‘복지만리’란 영화는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은 일제가 조선 민중들을 만주 개척에 동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제목의 복지(福地)는 만주를 뜻한다. 영화에 함께 삽입된 다른 노래는 더 노골적으로 그 같은 주제를 담고 있고, 가사의 3절이 아예 일본어로 돼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북한의 평가는 정반대다. 북한 방송은 “우리 인민은 기어이 조국 해방을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다듬으며 ‘대지의 항구’를 애창했다”고 설명해 반일 저항가요의 반열에 올렸다. 누구 말이 옳은지는 시간이 밝혀줄 것이다.

어찌됐건 남과 북의 주민들이 만나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의 레퍼토리가 한 곡 더 늘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매번 ‘반갑습니다’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만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