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神이 안내리는 굿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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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술좌석에서 새롭게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은 장태완(張泰玩)과 이강석(李康石)이다.12.12를 다룬 TV드라마로 다시주목받게된 장태완씨를 이야기할 때는 좌석이 떠들썩해진다.진짜 군인같은 사람봤다는 둥,대통령감이라는 둥,막판에 가서 굴복해버린게 못내 아쉽다는둥 저마다 한마디씩이다.
그러나 이강석에 대한 화제도 여유로울 수만은 없다.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닌 35년전의 인물이 새삼 화제가 되는 기막힌 현실-.화제로는 올리되 목소리는 잦아들고 화제가 길게 이어지지는않는다.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성찰에서 오는주저때문은 아닐 것이다.차마 그렇게까지 모진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돼서 우리가 영영 잊고만 싶은 저 처절했던 비극을 이 시절에 다시 떠올리게 되는가.아무리 접어 생각하려해도이해가 안되는게 노태우(盧泰愚)씨의 저 엄청난 축재다.
순수 재야세력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지난 시대의 모순과 비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한 외국신문은 논평했다.
일리있는 말이다.본의든 아니든,많든 적든 많은 사람들이 저 긴어둠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옷에 흙을 묻혀왔다.
그래선가 논리적.법적으로는 물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정경유착이나 정치권의 검은 거래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념에 가까운 생각들을 해왔다.「한 200억~300억원만 됐더라도…」하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체념때문일 것이다.
사실 200억~300억원을 숨겨나와 잘게 쪼개고 세탁해 이곳저곳에 감춰두었더라면 들통도 나지 않았을뻔 했고 들통이 났어도이렇게까지 세상을 놀라게 하지도 않았을는지 모른다.권력세계에 빈손으로 뛰어들어 200억~300억원쯤 축재한 사람이야 어디 한 둘이던가.
그러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축재로 해서 「작은 도둑」들마저 입을 딱 벌리게 된 것이다.
뉴스위크의 표지 제목대로 이번 사건은 국가적 수치임에 틀림없다.나라를 빼앗긴 것만이 국치(國恥)는 아니다.정치적.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라는 자부심과 명예는 하루아침에 휴지처럼 구겨졌다.나라는 안 빼앗겼지만 이 사건을 세계의 기억에 서 지우는데도 36년이란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측면도 있다.한 200억~300억원을 숨겨나왔다면 그렁저렁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랬다면 비리는 관행이란 이름아래 계속되었을 것이 아닌가.쓰고남은 돈만 2,000억원이 넘는 부정이 저질러졌 기에 우리는 대수술에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필연은 우연을 관통한다」는 헤겔의 말이 생각난다.盧씨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탐욕은 분명히 우연이겠지만 그 우연속에는필연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단절과 청산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음을 이번 사건은 말해주고 있다.물이 10 0도까지 끓으면 기체로 질적 변화하는 것이 필연이듯 정치권도 이제는 변하지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국면을 맞고 있음을 이번 사건은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조급증과 대충주의,그리고 망각증이다.벌써부터 盧씨 사건이 신물이 난다고들 말하기 시작했다.
빨리 매듭을 지어야지 언제까지 이럴거냐는 소리도 나온다.이를 틈타 정치권은 슬금슬금 이 사건을 이용할 책략이나 짜내고 있다.하기는 정치권의 그런 덫에 걸려 사건을 덮고나면 우리는 얼마안가 다시 망각증에 빠져들어버릴지 모른다.지금 삼풍사고를 누가기억하고 있나.먼 옛날의 이야기만 같지 않은가.
이번 사건만은 그렇게 넘겨 버려선 안된다.단순한 감정풀이로 끝내서도 안된다.워낙 엄청난 사건이고 국민이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니 지난 날의 많은 사건들처럼은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구속도 할 것이고,소환도 꼬리를 물 것이다.그러나 감 옥에 보내는것으로 끝낼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진실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는 이땅에 이번과 같은 국치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데 있다.그러나 웬일인지 굿판이 요란하기는 한데 신(神)이 내리는 기미는 없다.내가 잘못했다는 소리는 없이 네가 잘못했다는 악다구니만 요란해 신성해 야 할 굿판은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과연 이래도 좋은 것인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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