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승만.노태우.그리고 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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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숨인지 분노인지 모를 소리가 그리 크지도 않게 이 사회의 밑바닥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차라리 울부짖는 소리라면 속이라도풀리련만,그러지도 못한채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떨구고 무표정하게 거리를 걷는다.체념과 냉소만이 흐른다.
이럴 때의 정치가 가장 어렵고 위험하다고 정치학자 메리엄은 경고하고 있다.나같이 밥술이나 먹고 사는 사람이야 그가 얼마를먹었든 당장 굶을 일은 없지만,구멍가게에서 라면을 훔치다 차가운 영창에 갇혀 있는 소년과 몇천만원이 없어 자 살한 중소기업사장의 미망인이나 그 유자녀의 무너진 억장은 누가 보듬어줄 것인가. 정치인이 몰락하는데는 네가지 함정이 있다.돈(finance)에 깨끗하지 못할때,심리적으로 무기력(frustration)할 때,집안(family)을 다스리지 못했을 때,몸이 허약(fatigue)할 때가 그것이다.이 네가지가 모두 영 어로는F로 시작하기 때문에 정치학에서는 이를 「4F의 함정」이라 부른다. 노태우(盧泰愚)씨의 경우를 보면 몸 튼튼한 것을 빼고는그 어느 하나에도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지나간 대통령들이 생각난다.우리의 헌정사에 여섯명의 대통령이 명멸했다.
그 어느 하나도 국민들의 갈채속에 우아하게 퇴임한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슬픈 민족이다.모두가 흠이 있었고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돈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게 게걸스러웠던 전례가 없다.
우리 세대가 유학을 떠나려고 선배나 은사들을 찾아뵐 때면 그분들은 회고조로 그 당시의 외환 사정을 들려준다.1950년대에여의도비행장을 통해 출국한 선배들은 당시 몇십 달러를 가지고 나가기 위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결재를 받 았던 사실을 감회 깊게 들려준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온갖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있었지만 그가 금전에 추악했다는 말은 없었고 그것은 사실로도 뒷받침됐다. ***스위스은행돈 20만달러 盧씨가 재임할 때 그의 딸이 마사회에 가서 말을 탔다고 대로한 적이 있었고,당시 그의측근들은 그 사람이 그만큼 공사(公私)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떠들어댔다.
그후 세월이 흘러 그 딸의 스위스은행돈 20만달러 사건이 일어났다.그러나 말 한번 탔다고 그렇게 진노했다던 그 사람이 이번에는 자식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사돈의 것이라고 말했다.그는눈물을 짜면서 『지금도 애쓰고 있는 기업인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이 부분에서 그는 참으로 그답게 교활하다.
요즘 느닷없이 여자 스타킹이 대문짝만하게 광고로 등장하고 있다.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스타킹 광고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여덟번이나 기워서 신은 유품이었다.
이화장 조각당(組閣堂)에 깔린 돗자리는 두 내외분이 돋보기를쓰고 기운 것이었다고 당시의 각료들은 회고했다.똑같은 대통령의아내요,똑같이 호사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일텐데 왜 누구는 스타킹을 깁고 있어야 하고,누구는 이멜다처럼 부속 실에 대형금고를두고 수금해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내는 영원한 애물? 자고로 아내 잘못 둬 패가망신한 사람이 한둘일까만은 이건 너무했다.1만원권 지폐를 10트럭으로다섯대분이나 지니고 있으면서도 음성 꽃동네에 월 1,000원을보내며 사회의 어두운 곳을 보살피느라고 돈이 필요했다는 그 가증스러운 말 이 어쩌면 부창부수(夫唱婦隨)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무리 길게 살아도 김장 스무번 담그기 전에 끝날 인생인데 하루에 1억원을 써도 다 못쓰고 죽을 돈에 왜 그리 집착했을까. 정말로 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회가 구역질나도록 싫다.좀 가난하더라도 정이 있고 미소가 있고 희망이 있는 나라에 살고 싶다.우리 대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자식 대에라도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
우리가 박복해 어차피 이 짐승만도 못한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따로따로라도 살고 싶다.그들은 감옥에서,그리고 선량한 시민들은 그 밖에서.
(건국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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