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남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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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것은 네 이름이지만 네 몸에 있는 게 아니라 남의 입에 달린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으며, 영광스러울 수도 욕될 수도, 귀할 수도 천할 수도 있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네 이름이 언제나 네 몸뚱이에 돌아올지 모르겠구나.”

매월당 김시습이 불도를 닦기 위해 속명을 버리고 법호를 따르길 원하니 스승인 큰스님이 박장대소하며 했다는 말이다. 스님이야 웃으며 말했다지만 듣는 매월당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을 터다. 내 이름이 남의 입 속에서 잘근잘근 씹혔다 뱉어지는 걸 상상하면 어찌 머리털이 곤두서지 않겠나 말이다. 논어·맹자가 따로 없는 훌륭한 처신훈(處身訓)이 될 수 있을 법하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얘기 아닌가. 나보다 남이 부르는 게 내 이름인지라 도무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거다. 스스로 귀하다 외쳐봐야 남이 그렇게 불러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까닭이다. 요즘 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사람들이 우리의 일 잘 하는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일 성싶다. 그토록 호기있게 작명했던 ‘이명박 정부’가 취임 백일도 못 돼 내세우기 초라한 이름이 돼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말이다. 새벽별 보며 열심히 뛴 노고를 알아주기는커녕 열 중 일곱 국민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에 혼란스럽기도 할 터다. 그래서 좀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다. 연일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더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은 흡족하지가 않다. 어쩐지 머슴 앞에 엎드려 절받는 기분이다. 그들이 소통을 마치 홍보의 동의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다. 머슴이 주인과 소통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다. 머슴이 낮은 자세로 주인을 섬기는 건 당연한 의무지, 말로 떠들 일이 아닌 거다. 설령 주인을 얕잡았던 반성이 있더라도 머슴끼리 뒷마당에서 소곤댈 거지, 주인 앞에서 마이크 잡고 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말꼬리를 잡자는 게 아니라 아직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하는 얘기다.

머슴 중에는 국정홍보처가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는 안 갔을 거라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다고 들린다. 상머슴이 친한 바깥 머슴들을 불러 상의했더니 거기서도 홍보의 중요성이 강조됐다는 거다. 참 어리석고도 위험한 발상이다. 바로 앞 참여 머슴들이 어떡하다 조리 돌려지고 내쫓겼는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약점을 독선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독선이 다른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혼자 착한 줄 아는 거다.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몰라줘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잘못을 고칠 생각은 않고 ‘잘 한 점을 좀 더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게 독선이란 말이다.

잘못의 출발점은 잘못된 인사였다. 그것이 잘못된 공천으로 이어져 병세를 악화시켰다. 지금도 뭐가 잘못인지 모른다면 대통령이 한번 따져보면 된다. 내가 뽑은 사람 중 나한테 듣기싫은 소리 한 사람이 과연 있었는지 말이다. 혼자 착한 사람과 박수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다.

앞의 매월당 일화는 연암 박지원이 친구 이덕무를 골려주려 지어낸 것이다. 선귤당(蟬橘堂)이라는 호를 새로 지은 걸 두고 이름으로 사람이 빛나진 않는다는 꼬집음이었다. 선귤이란 매미와 귤이다. 이덕무의 대답은 이랬다. “매미가 벗은 허물이 말라붙고 귤이 시들어 껍질만 남았는데 어디에 소리와 내음이 있겠소.” 이런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으로 그는 매미가 되고 귤 알맹이가 됐다.

독선의 옷을 벗어야 한다. 말은 접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명박 정부’란 이름은 끝내 허물과 껍질만 남고 말 것이다. 그것을 가름할 것 역시 인사일 터다. 그들 앞에는 곧 공기업 인사라는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