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씨 비자금 파문-꼬리무는 의문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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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계동(朴啓東)의원이 폭로한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거액 비자금계좌설은 이현우(李賢雨)전경호실장의 검찰진술을 계기로 실체가 확인됐으나 갖가지 의문점이 꼬리를 물고있다.
◇하종욱씨는 왜 제보했나.
하씨는 자신이 빌려준 차명계좌에 대해 내년초 7억여원의 종합금융과세가 나오게 될 것을 우려해 고교선배인 박의원에게 상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처음 거론했다고 했다.
그러나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개설된 계좌는 하씨가 운영하는 회사의 현재 상호인 우일종합물류가 아닌 과거의 상호인 우일양행명의로 돼있다.따라서 종합금융과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으로 서 기본적인 세무상식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설사 하씨가 과세대상이 된다고 굳게 믿었더라도 자신에게 차명계좌개설을 부탁했던 신한은행 서소문지점 관계자들과 상의했다면 충분히 이를 해결해주었을 것이다.
300억원의 비자금을 맡아 주고 있는 명의인에게 7억원정도의세금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전주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사건의 충격파에 비해 하씨의 제보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점을 들어 특정집단의 치밀한 각본에 의한 사주설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현우 전경호실장은 왜 출두했나.
이씨의 자진출두는 「도마뱀꼬리자르기 작전」이라는 것이 대체적시각이었다.
비자금의 규모를 300억원선에서 차단하고 노 전대통령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막자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6공 핵심이 출두함으로써 『여차하면 함께 망할 수있다』는 식의 모양새를 보여 이 사건의 확대를 저지하자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았다.
노 전대통령측은 ▶노씨는 아무것도 몰랐고▶485억원의 비자금은 이현우 전실장이 자신을 속이고 숨겨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씨의 진술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이씨는 ▶노 전대통령이 직접 통치자금을 조성해 자신은 조성경위를 모르며▶통치자금은 노 전대통령이 직접 수표로 건네줬고▶이 돈을 퇴임후 공익사업에 쓰려 했다는 등의 진술을 했다.
이에따라 검찰은 이 돈이 불법 조성된 정치자금일 경우 관련자에 대한 사법처리가 가능한 것으로 보고 노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노씨측으로선 최악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연희동 주변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좋지않은 두사람의 관계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떠 넘기기」를 할 정도로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주변에서는 5공실세였던 장세동(張世東)전안기부장의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이씨로부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우근(李祐根) 전신한은행서소문지점장은 왜 비자금 300억원의 소재를 쉽게 확인해주었나.
이 전지점장은 박계동의원의 폭로직후 300억원의 차명계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선히 시인했다.
당초 「미확인 폭로」로만 끝날 가능성이 점쳐지던 이번 사건에대해 은행감독원의 조사와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것은 이씨의 확인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은행의 고위간부인 이씨는 이번 발설로 은행측에 의해 금융실명제에 관한 긴급재정명령위반으로 검찰에 고발까지 됐다.
자신의 신상에 결정적인 불이익이 닥칠 것을 충분히 알았을 이씨가 보여준 태도는 뜻밖이었다.
더구나 이 전지점장은 문제의 300억원을 92년11월부터 93년 3월 사이에 이태진 전청와대 경호실경리과장으로부터 건네받았던 만큼 이 자금의 성격에 대해서도 감을 잡고 있었던 상태였다. 정.재계에 일파만파를 불러올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거짓말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씨는 금융인으로서의 양심과 정의감에서 사실을 밝혔을 가능성이 높다.더구나 박의원쪽에 잔고증명서까지 흘러나간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이씨가 주저없이 차명계좌의 존재사실을 시인한 배경과 관련해 여러가지 억측이 나돌고 있다.
◇허술한 비자금 관리.
신한은행에 입금된 노씨의 비자금은 모두 100억원이상 단위의큰 덩어리로 관리돼 쉽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실명확인도 안한채 2년이상 방치해둔 것도 결과적으로 이번 사태를 불러온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처럼 비자금이 허술하게 운용.관리돼온 것은 금융실명제 실시로 떳떳하지 못한 돈이 운신의 폭이 좁아진 상태에서 미처 탈출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에대해 일부에서는 노씨측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인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정.재계에 미칠 파장을 감안했을때 정치권의 비자금을 수사하는데는 현정부도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는 만큼 쉽사리 메스를 대지 못하리라는 판단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한 은행 지점장은 『실명제 이전에는 비자금 소유주가 돈이 있는 계좌의 소재만 알려주면 은행측이 알아서 20~30차례 다른금융기관에 넣었다 뺐다하고 심지어는 도중에 현금화까지 한뒤 자기 점포에 입금하곤 했다』며 『대통령이 수표를 직접 건네주고 이를 바로 은행에 입금했다니 납득이 안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권이양을 앞두고 거액자금을 모으고 나누는등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실수가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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