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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은 없다' 주장 아무런 근거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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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근에 '실학은 없다', 1930년대 몇몇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사람들의 머리를 혼란시켜서 사회적 충격이 없지 않은 듯하다. 나는 실학이 역사적으로 있었음은 물론, 현재성이 엄연하다는 점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런 담론이 학계에는 새삼스러워 필요하지 않겠지만 사회 일반의 의혹을 풀어주는 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실학이 30년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은 맞다. 그렇지만 원래 없었던 것을 허위로 날조한 것이냐고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실학이란 개념을 추출한 현실이 대단히 풍부한 실체로서 있었다. 다름 아닌 실학으로 인식된 학자들, 이 분들이 남긴 저작물이 그것이다.

예컨대 이익의 '성호사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 등에 최한기의 '명남루총서'까지 꼽을 수 있다. 이들을 특별히 주목해 학적 체계로서 파악하였으니 거기에 '실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른바 '실학'이란 대상에 관심이 돌아간 것은 30년대가 처음이 아니다. 1900년대 초 근대계몽기에 실학을 현실 개혁의 유효한 방법론으로 고려하면서 그 저술들이 속속 공간됐다. 30년대는 실학인식사의 제2단계에 해당하는 셈이다. 당시 일제가 파시즘으로 치닫던 엄혹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자기 정체성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응해 민족의 역사.언어.문학 등에 학적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바 이것이 곧 '조선학운동'이며, 조선학의 뿌리로서 실학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 국어나 국문학이 '근대적'으로 만들어졌듯 실학이 만들어졌다. 비록 국문학은 그 이름으로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국문학을 부인하려 들지 않는데, 유독 실학에 대해서만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근거와 당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굳이 따지자면 실학이란 명사를 역사적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문제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학은 '허학'에 상대되는 보통명사이니 국어사전에도 일차적 의미는 '실제로 소용되는 학문'이라고 풀이돼 있는 것이다. 이런 뜻이라면 현대 사회에서는 경영학이나 기술공학이야말로 진짜 실학이 된다. 옛 문헌에서도 진실한 학문의 자세를 수식해 실학이라고 한 용례를 허다하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17~19세기의 신학풍을 중요시한 한국의 20세기는 이것만을 실학으로 인식했다.

거기에는 한국 근대의 민족적 고뇌와 함께 역사적 지향이 함축돼 있다. 이를 반영해 국어사전에도 실학의 둘째 의미로 조선 후기에 발흥한 신학풍을 지칭한다고 올라 있다. 르네상스가 본디 부활이란 뜻의 보통명사이지만 특정한 역사운동을 지칭하듯 실학 역시 역사적 개념으로 이미 공인받은 것이다.

요컨대 실학을 학적으로 발견한 것은 지난 20세기다. 그렇다면 21세기 오늘의 새로운 상황에서 실학은 어떤 가치를 갖게 될까? 물론 시대환경이 크게 달라지고 있으므로 실학은 사뭇 다르게 비춰질 수밖에 없다. 20세기에 인식된 실학은 '근대적 편향'이 없지 않았다. 실로 비판적.반성적 '실학 읽기'를 요망하는 시점이다.

21세기 현재 실학은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실학의 방대한 유산은- 청산은 청산이듯 오늘도 우리 앞에 있는데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파고드느냐- 현재성을 어떻게 분석하느냐는 것이다. 실학이 내장하고 있는 두 가지 측면을 보자. 하나는 실사구시다. 바야흐로 개혁이 진행되는 한국 사회는 시행착오로 몹시 혼란스럽다. 이럴 때일수록 실학의 실사구시는 무한히 아쉽게 여겨진다. 다른 하나는 서구 주도의 근대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핵심적 과제이며, 문명사적 반성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실학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