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점퍼 정치, 천막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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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당 건물이 갑자기 초라해졌다. 건물이랄 것도 없다. 열린우리당이 청과물시장 안의 공판장 건물로 이사한 데 이어 한나라당은 천막.컨테이너로 당사를 차렸다. 대선자금 수사로 드러난 정치권의 부패상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의식한 결과다.

우리는 정당들의 이러한 변화를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가 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호화로운 당사, 비대한 당 조직, 물 쓰듯 하는 선거자금 등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웃음거리였다. 공판장 당사나 천막.컨테이너 당사는 이러한 불합리와 부패정치에 대한 자정(自淨)노력의 한 상징이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정당이 이러한 저급한 정치쇼로 또다시 국민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떨쳐버릴 수 없다. 양복은 양복대로 다 차려입고 그 위에 노란 점퍼.파란 점퍼를 한벌 또 입고 다니는 행태나 초라한 당사에서 회의를 마친 고위 당직자와 국회의원, 그리고 그들의 비서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은 한편의 코미디가 될 수 있다. 점퍼를 입었다고, 천막에 앉았다고 국민이 더 좋게 봐준다면 그 국민도 한심한 국민이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초라한 당사가 깨끗한 정치로의 첫발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천막 당사에 앉았다고, 시장 바닥에 앉았다고 한국 정치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 이런 식의 눈가림과 가벼움으로만 국민의 눈길을 끌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벤트 정치는 한국 정치를 점점 더 천박함으로 몰아갈 뿐이다.

더러운 몸에 향수만 뿌린다고 몸이 깨끗해지지 않는다. 화려한 외투로 더러운 몸을 감춘다고 더러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 정치가 카메라만 의식한 이벤트뿐이라면 이는 또 다른 기만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내용이, 질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를 더 고민해야 한다. 정책과 공약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뽑을 사람은 4년간 국정을 맡을 국회의원이지 연기 잘하는 배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