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형에 치인 아우’가 역사를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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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 29일 개봉하는 ‘위 오운 더 나잇’(We Own the Night)은 마약조직과 사투를 벌이는 뉴욕 경찰의 얘기다. 영화의 주인공은 서로 다른 인생을 선택한 두 형제. 형(마크 월버그)은 경찰서장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에 입문했다. 반면 동생(호아킨 피닉스)은 나이트 클럽 매니저로 일한다. 아버지(로버트 듀발)는 형에게 무한한 신뢰를, 동생에게 크나큰 실망을 표시한다. 형은 아버지의 규율을 지키며 성실한 가장이, 동생은 아버지에 반발해 기분파 건달이 됐기 때문이다. 두 형제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2 기자에게는 초등학교 6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이 있다. 두 살 터울 때문인지 충돌이 잦다. 요즘에는 컴퓨터 게임을 두고 대단한 신경전을 벌인다. 둘 다 내세우는 건 ‘공평함’. 누가 하나라도 더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반드시 항의가 들어온다. 아이들에게 컴퓨터 게임은 한정된 ‘재화’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를 차지하려고 파워게임을 벌인다. 부모가 양보를 강조해도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런 다툼이 아이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까.

신간 『타고난 반항아』를 읽으면서 떠올린 단상이다. 제목부터 제법 도발적인 이 책의 논지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 같다.

“가정은 매일매일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요, 또 형제·자매들은 투쟁 속에서 자신의 성격을 만들어간다. 핵심 변수는 출생 순서다. 대체로 맏이는 부모에 순응하며 체제유지적 성향을 보이지만, 둘째부터는 부모로 상징되는 기성가치에 맞서며 개혁적 성향을 키워간다. 과학이든, 정치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창조적 발상·발견은 형이 아닌 동생들의 몫이다.”

일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다. 주변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럴 듯하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사실 3분의1 가량은 저자가 수행한 연구방법에 대한 해설이다)에 촘촘히 박힌 사례와 정교한 논리에 설득 당하지 않을 수 없다. 미 UC 버클리대 교수로 있는 저자는 출생 순서와 가족역학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20년 넘게 연구해왔다. 대단한 ‘한 우물’ 정신이다.

『타고난 반항아』는 소위 ‘통섭’의 결과물이다. 생물학·심리학·역사학·사회학 등 여러 학문의 성과를 가로 세로로 엮어 놓았다. 키워드는 다윈의 진화이론. 저자는 여기에 동물행동학·유전학을 결합해 ‘진화심리학’의 요체를 보여준다. 쉽게 말해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듯 사람의 성격도 환경(가족·시대)와 갈등하며 진화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진화의 동력으로 출생 순서를 꼽는다. 부모의 보살핌이라는 동일한 자원을 놓고 자기만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형제 경쟁’을 문화와 역사를 이끌어온 ‘엔진’으로 규정한다. 특히 다윈·코페르니쿠스·마르크스·볼테르 등 급진적 ‘반항아’들은 주로 후순위 출생자였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단지 명사 몇 명의 전기를 인용하는 게 아니라 무려 6500여 명의 인물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이들의 출생·사상·성격 등을 총합적으로 분석해낸 결과다.

일례로 이 책의 주연배우 다윈은 여섯 자녀 중 다섯째였다. 코페르니쿠스도 네 자녀 가운데 막내였다.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도 부모가 편애했던 누나에 대한 열패감 속에서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웠다. 가족 내에서 ‘패배자’인, 즉 맏이보다 관심을 덜 받고 자란 동생들은 기존 통념을 뒤집는 신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약자에 대한 동정과 평등적인 세계관을 지지해왔다는 것이다.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당연, 나중에 태어난 아이가 많으니 개혁(혁명)가도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승산비(odds ratio)라는 통계치를 활용한다. 누적 수치가 개인 대 개인 차원에서 두 집단을 비교했다. 진화론의 바이블인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을 기준으로 볼 때, 다윈 같은 후순위 출생자들은 첫째들에 비해 진화론을 지지한 확률이 9.7배 높았다고 한다. 또 지난 500년간 서양사를 조사한 결과 동생들은 형들보다 프랑스혁명·공산주의 혁명 등 급진적 정치혁명을 18배나 높게 옹호했고, 신교도 종교개혁기에도 후순위 출생자들은 첫째들보다 순교할 확률이 48배나 높았다.

‘형제전쟁’에서 외자식도 예외가 아니다. 외동의 경우 보통 수유기간을 늘리고, 엄마의 배란을 억제하면서 동생을 보는 시간을 지연시키곤 한다. 자기 것을 챙기려는 이기적 유전자가 작동한 것이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오류도 거론한다. 부모와 자식의 성적 갈등을 지목한 프로이트나, 계급투쟁을 역사의 추진력으로 꼽은 마르크스 모두 형제 사이에 숨겨진 승부욕을 간과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일부 독자에게 불편할 수 있다. 진화라는 잣대 앞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사라진다. 신의 위대한 창조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학의 성취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겐 매혹적이다. 미지를 열어가는 이성의 힘을 엿볼 수 있다. 단, 첫째가 동생보다 ‘덜 떨어진’ 존재라는 오해는 하지 마시길. 첫째들은 대개 동생들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려왔다. 단지 성격이 다르게 진화해왔고, 그게 우리의 초상일 뿐이다. 원제 『Born to Rebel』(1996).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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