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우리아이들지상상담실>컴퓨터 연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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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허구한날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있길래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죠.점점 입맛을 잃고 늘 기운이 없는 것도 무리한 공부때문인줄 알았는데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지난달에 무려 30만원이넘는 전화요금 청구서를 보고야 컴퓨터통신 때문이 란걸 알았어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행여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하여 애써마련해준 컴퓨터가 아들을 이렇게 만들줄은 미처 몰랐다며 오(고2)군의 어머니는 한숨지었다.
친구로부터 「채팅」을 배운 오군은「왠지 얘기가 잘 통하는」여학생과 밤늦도록 온갖 대화를 나누는 재미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학교성적이 좀처럼 오르지않아 몹시 불안하던 터에 일단 컴퓨터 앞에 앉아 낯모르는 친구들,특히 그 여학생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세상만사 다 잊고 데이트하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어 밤새는 줄도 몰랐 다.
「상상 속의 그대」는 어느덧 오군 앞에 마주앉아 황홀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실제 인물로 느껴질 정도가 됐다.하얀 피부,갸름하고 예쁜 얼굴,생기 넘치면서도 차분한 말투….상상속에서 점점 구체화한 여학생과 데이트하느라 키보드를 두드리 다보면 오군은 손끝에 짜릿한 전율까지 느끼게 된 것이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가 오군 남매가 보는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부부싸움을 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말없는 아이로 자란 오군에게 컴퓨터 대화방은 더할나위 없는 탈출구가 됐던 것이다.그러나학교에서는 언제나 기운이 없고,성적까지 나빠지니 멋진 「영어선생님」이 되려던 꿈도 점점 멀어져 오군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못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오군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고서도 부모나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털어놓는 방법을차츰 익히게 됐다.상담원의 권유로 매일 아침운동을 조금씩 늘릴수록 환상속의 여학생에 대한 집념은 반비례하듯 줄어들 고 무기력한 생활에서 차츰 벗어나게 됐다.마음을 짓누르던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고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한 목표가 확실해지면서 오군의 눈빛도 되살아났다.
박성수〈청소년대화의 광장 원장.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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