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글 배워 ‘작가’된 과일가게 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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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게 없음 허전해서 일이 안 돼.”

경상남도 진해시 경화동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전찬애(67·사진) 할머니는 집을 나설 때 볼펜 한 자루를 반드시 챙긴다. 전씨는 볼펜을 ‘내 친구’라고 부른다. 구성진 사투리에 걸걸한 웃음을 가진 그는 아홉 살 무렵부터 펜을 벗삼아 틈틈이 글을 써왔다. 그리고 글 쪽지들을 모아 최근 자전적 소설 『고향 떠난 두 남매 길』(삶과꿈, 382쪽, 1만2000원)을 펴냈다.

달콤한 참외 냄새가 가득한 가게 한켠엔 그가 “보물”이라고 부르는 저서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과일과 책을 함께 판다고 했다. 가게에는 네 자녀가 걸어 줬다는 ‘경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출판 소감을 묻자 한참을 먼 산을 바라보다 왈칵 눈물을 쏟았다.

“대단한 작가가 되려고 한 건 아니고. 글을 쓰지 않으면 못 견딜 거 같아서 끼적거렸던 걸 그냥 남기고 싶었던 게지. 책을 내고 엄청나게 울었지. 감격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잠도 못 잤어.”

무엇보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경남 의령의 가난한 농가 출신인 전씨는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어머니가 몸져 누웠을 때도, 공 들인 고추농사가 내리 망했을 때도 펜을 잡고 상한 마음을 달랬다. 펜은 고된 삶을 달래 주는 동반자였다.

전씨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질 못했다. 대신 신문이 글 선생님 노릇을 했다. 신문을 보며 한글을 익힌 뒤 『심청전』『장화홍련전』같은 연재소설을 읽으며 글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읽고 나선 꼭 동네 아이들에게 다시 얘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노릇을 했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쁠 때도, 속상할 때도 그저 펜으로 내 마음을 쓰면 속이 편해졌어. 그래서 밥을 하면서도 글을 쓰고, 김을 매면서도 쓰고, 사과를 팔면서도 글을 썼어. 실성한 사람처럼도 보인다고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못 견디겠는 걸 어떻게 하겠나.”

그렇게 쌓아온 메모가 수천 장. 글 쓰는 과일가게 할머니가 있다는 소문에 지역 신문·방송에서 줄이어 찾아왔다. 지역에선 유명인사가 됐다. 어느 날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원고지에 옮겨 정리했다. 이를 신춘문예에도 내밀어 봤다.

“언감생심이지. 대신 이렇게 책 냈잖아. 그거면 됐어. 나는 펜만 있으면 돼. 그런데 자꾸 주변 이야기를 글로 더 쓰고 싶어지네. 젊은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어떤 상황이든 살아야 된다는 거야. 한 계단씩 차근차근 밟아가면 어떤 힘든 일도 지나가는 법. 난 살면서 그걸 배웠어.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책 쓸 재목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돼. 글을 쓰는 건 내가 세상과 통하는 방법이야.”

글을 한 수 청했더니 개구리 참외 박스를 찢어 무릎에 놓고 쓰기 시작했다.

“그제 어여쁘게 방긋방긋 웃던 벚꽃들은 어디론지 가버렸네/ 나의 벗이 사라져 지금 나 혼자니 서운하다.”

진해=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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