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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박근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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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돛이 배를 움직인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기에 돛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돛이 배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1981년 박근혜가 스물아홉살 때 일기장에 적은 글이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지 2년이 채 안 됐을 때다. 朴대통령의 업적과 명예는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거나 마지못해 따르거나 숨어서 저항하던 시대였다. 정권은 그의 대외활동을 제한했다.

이 글엔 눈에 보이는 권력이 세상을 이끈다고 믿는 교만한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배어 있다. 권력보다 중요한 건 보이진 않지만 느껴지는 바람, 민심이란 메시지가 담겼다. 정치권에 입문하기까지 박근혜의 일기는 혼돈의 세상에서 인생의 배를 움직이는 바람은 무엇이고, 사람을 착각에 빠뜨리는 돛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사색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서 23년이 흘렀다. 이제 쉰두살의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대표가 됐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영광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물려받은 한나라당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한나라당의 리더들은 돛만 보고 바람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는 두번에 걸쳐'이회창 대세론'에 의지했다. 서청원 전 대표는 대선 패배의 주역들로 당을 운영했다. 최병렬 전 대표는 '집토끼는 달아나지 않는다'는 한나라당 고정표의 신화에 빠져 있었다. 오만했다. 자기와 자기세력의 힘에 집착했고, 그것을 과신했다. 민심의 바람에 맞춰 당을 뜯어고치기보다 거대한 돛이 당을 살려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탄핵 역풍이란 사상 최대의 풍랑 속에 박근혜가 타이타닉호의 키를 넘겨받았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라고. 朴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후광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선언일 것이다. 물 새는 거대 정당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얘기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말이 실천에 옮겨지기 바란다. 스물아홉살 고통받던 시절에 깨우쳤던 바람과 돛의 통찰력이 세상의 시험대에 올랐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