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인도소풍, 기차를 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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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인수(1945~) '인도소풍, 기차를 누다' 전문

저녁에서 아침까지 가는 장거리 기차였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쪼그리고 앉으니, 발 디딘 데가 옛날의 '통시부틀' 같았습니다. 아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어봤자 사흘째 뒤가 막혀서, 한반도 사정처럼 땅덩이 모양처럼 뒤가 꽉 막혀서 오금쟁이만 잔뜩 저려왔습니다. 에라, 와그닥닥 닥닥 거대한 기차만, 기차 소리만 대륙적으로, 대륙진출적으로 한바탕 누고 나왔습니다.



섬진강 함허정(涵虛亭)의 통시 생각이 난다.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노라면 눈앞의 창에 감나무 가지가 선선히 흔들리고 어디선가 수수꽃다리 꽃향기가 풀풀 날아오는…. 어느 날엔 지나가던 낮달이 창안에 머물러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인도소풍, 기차를 누다…. 한밤중에 급히 달려가 앉으면 누군가 수레 가득 별을 싣고 가다 언덕에서 미끄러진 듯…. 창안엔 별들의 자욱한 꽃밭이었다. 그 초롱초롱한 꽃밭 어딘가에 눈맞추고 있노라면 시간.공간.추억.고통…. 그 모든 것이 사라진 무아지경이 찾아오고…. 나는 옛사람들이 뒷간을 분명 통시(通時)라고 적었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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