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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말 바꾸기에 국민은‘뿔’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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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광우병 촛불집회를 보면서 떠오른 의문 하나. 집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미국산 쇠고기로부터 국민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불과 며칠 전 서울에서도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발견됐다. 광우병은 병든 소의 골수나 내장을 먹어야 걸리지만 AI는 공기로도 옮는다. 고작 자연학습장 꿩 두 마리가 AI에 걸려 죽었을 뿐인데 애꿎은 인근 새의 씨를 말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하물며 자기도 모르는 새 AI 바이러스에 노출됐거나, 감염된 사람이 군중 속에 섞인다면 어찌 될까. 진정 국민 건강과 생명을 걱정한다면 대중 집회부터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

잠시만 따져 봐도 자가당착에 빠지는 게 광우병 괴담이다. 하지만 이게 온 나라를 들었다 놓게 한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광우병 위험이나 협상 결과를 두고 수시로 말을 바꾸니 국민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30개월 이상 되면 위험하다던 미국 소다. 한데, 한국 대통령이 바뀌자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로 둔갑했다. 마술 쇼가 아니라면 충분한 설명이 필요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일정만 급했지 정작 중요한 국민은 안중에 없었던 거다.

광우병 괴담에 묻혀 버렸지만 정권이 바뀐 뒤 정부가 슬그머니 말을 바꾼 게 또 있다. 펀드 수수료 수술이다. 지난해 7월 10일 옛 금융감독위원회 정례 브리핑에서 김주현 감독정책2국장은 “불합리한 펀드 보수·수수료 체계를 합리적으로 고쳐 올해 안에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한 달 뒤 공청회도 열렸다. 다양한 개선 방안이 쏟아졌다. 펀드 투자자로선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펀드를 파는 은행·증권사는 다급해졌다. 저금리 시대 짭짤한 수입원이었던 판매 수수료가 쪼그라들 판이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로비가 시작된 건 당연했다.

그래서였을까. 연내 수술하겠다던 금감위의 칼날은 갈수록 무디어졌다. 급기야 정권이 바뀐 뒤 새로 출범한 금융위는 지난주 이 방안을 없었던 일로 덮어 버렸다. 내년 2월 시행할 자본시장통합법에 보완 조치를 반영했다는 이유에서다. 펀드 수수료 공시 의무화나 은행·증권과 독립된 펀드 판매회사 설립 허용이 대표적 예다. 이 조치로 경쟁이 치열해지면 수수료는 자연히 떨어질 거란 설명이었다.

하지만 금융위 논리는 옹색하기 짝이 없다. 펀드 수수료는 지금도 공개하고 있다. 성경에선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지만 현실에선 영세한 독립 판매회사만으로 전국 지점망을 갖춘 은행·증권과 ‘맞짱’ 뜨긴 어렵다. 350조원 펀드시장에 수수료 싼 온라인 전용 펀드 설정액이 1조원에도 못 미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펀드 만드는 운용사가 판매망을 장악한 은행·증권 눈치 보느라 인기 펀드는 온라인 전용으로 내놓길 꺼려서다.

애초 금감위가 펀드 수수료 수술에 나선 것도 단단한 판매사 과점 구조를 깨보자는 취지였다. 최근 2~3년 사이 펀드시장은 배 가까이 성장했다. 펀드 덩치가 커지면 수수료는 내려가야 정상이다. 1조원짜리나 2조원짜리나 펀드 굴리고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지난 5년간 펀드 수수료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바꿔 말하면 규모의 경제로 이익은 늘었으나 투자자에겐 국물도 없었다는 얘기다. 더욱이 국내에선 펀드 수수료(보수)의 70%를 판매사가 가져간다. 게다가 정률제여서 투자금이 불면 판매사 몫은 저절로 늘게 돼 있다. 판매사 힘이 그만큼 막강하다. 판매사 입장에선 펀드를 팔기만 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가 되는 거다.

이쯤 되면 투자자는 ‘뿔’ 난다. 사정을 뻔히 아는 정부가 ‘시장 자율’을 구실 삼아 말을 바꾸니 답답할 노릇이다. 정부더러 수수료를 강제로 깎으란 소리가 아니다. 은행·증권이 장악한 판매시장에 경쟁이 싹틀 토양을 만들어 주라는 말이다.

정경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