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션 사태는 빙산의 일각 … 개인정보 유출 불감증이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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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잇따른 개인정보 유출 사태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가 성찰해봐야 할 화두를 하나 던졌다. 너나 없이 개인의 정보를 사소한 것으로 폄훼하는 의식이 우리 사회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다. 이진우(52) 계명대 총장이 논의의 물꼬를 트고 나섰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더 성숙하기 위해 ‘프라이버시 철학’을 정립하는 일이 필요한 때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사회의 공공성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서양에서 프라이버시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초로 존중되는 이유다. 이 총장은 대학 경영자이기에 앞서 철학자로서 ‘개인 대 공동체’라는 주제를 연구해 왔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 기획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시리즈’의 연사(3월 초~4월 초)로 나와 ‘프라이버시 철학’을 총 5회 강연했고, 때마침 옥션 사태가 터졌다. 그를 따로 만나 ‘프라이버시 철학’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프라이버시 유출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우리 국민의 불감증이라고 했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불감증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며, 무엇보다 집단주의가 지나치게 강한 전통의 영향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진우총장에 ‘프라이버시의 철학’을 묻다

 -‘프라이버시 철학’을 제시한 시점과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절묘하게 맞물렸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봤나.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겠지만 사회철학자로서 내가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개인정보의 관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불감증이다. 개인이나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강한데, 그 같은 경향이 사태를 초래한 근원적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옥션 사태는 빙산의 일각이다. 현대 사회는 개인에 대한 권력의 감시체계가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확보하고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문제를 민주화 이후의 과제로 심각히 고민해봐야 할 때다. 프라이버시란 ‘자기 자신의 정보에 관한 통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된다는 뜻은.

“현대사회는 점점 총체적 감시사회가 돼 간다. 조지 오웰이 그린 『1984년』의 내용이 현실화되고 있다. 영국 정보 보호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 개인이 하루에 감시카메라에 찍힐 수 있는 횟수가 무려 300회에 이른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사회 제도가 오히려 자유를 구속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확한 통계는 접하지 못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국정원·검찰·경찰 등 국가 조직의 개인정보 열람도 문제로 지적된다. 서구에서는 현대의 기술을 통해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걸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저항이 있다. 이런 저항이 ‘프라이버시권’을 발전시켰다. 우리에게는 그게 없다. 불감증이다. 서구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민주주의 자체가 독립된 개인에서부터 출발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도 프라이버시의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민주화가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키지 않았나.

“민주화란 개인이 국가 권력에 대항해 자유를 확보하려는 노력과 제도다. 반어법으로 표현하면 개인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제도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문화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았다. 개인과 개인주의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면 진정한 민주사회가 아니다. 공동체주의의 과잉 속에서 개인주의를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다.”

-프라이버시에는 어떤 종류가 있나.

“나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눈다. 첫째 ‘공간의 프라이버시’다. 개인이 외부 간섭 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공간을 확보하는 권리다. 둘째 ‘정보의 프라이버시’다. 자기 정보를 누구에게 어느 정도까지 공유할 것인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셋째 ‘결정의 프라이버시’다.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사회가 촘촘해질수록 개인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냉혹한 계산적 관계인 ‘비인격적 거리두기(impersonal distance)’가 아니라 ‘인격적 거리두기(personal distance)’, 즉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거리를 두는 것이 프라이버시 철학의 핵심이다. 유대감·소속감을 강제로 심으려는 문화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되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표현하되 의견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윤리인 시민의식도 프라이버시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싹튼다.”

-나라마다 문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서양에선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안 한다. 프라이버시 침해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선 교수 임용 면접을 볼 때조차 ‘결혼 못 하셨느냐, 안 하셨느냐, 비자발적 독신주의냐’ 이런 질문을 한다. 서양에선 그런 질문을 받으면 ‘None of your business’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그런 말을 들으면 자신이 거꾸로 상처를 받는다. 공동체의식이 그만큼 강한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자는 서양의 공동체주의자보다 훨씬 더 공동체주의적이고, 서양의 공동체주의자는 우리나라 자유주의자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적이다.”

-우리의 신세대 네티즌들은 좀 다르지 않은가.

“네티즌, 즉 인터넷을 사용하는 개인들이 프라이버시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갖고 있다면 사정은 좀 달랐을 것이다. 일례로 외국 인터넷 사이트에는 이름과 e-메일 주소 정도면 가입할 수 있는데 우리는 성인 인증한다며 주민번호에 주소·학력까지 다 물어본다. 이런 관행에 이의를 제기한 경우도 없지만 이번 같은 개인정보의 광범한 유출 사태에 대한 대응도 미약하다. 개인과 개인성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보유출 불감증’에 걸렸다고 보는 것이다.”

-프라이버시의 강조가 사회적 투명성을 약화시키는 것 아닐까.

“진정 걱정해야 할 문제는 프라이버시가 투명화되고 사회제도 및 권력이 익명화될 때 발생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사회의 투명성은 자유민주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과 같다. 모든 사람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프라이버시가 아니다. 예컨대 정부의 의사결정, 정책 진행 과정 등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공적 영역의 투명화는 민주화의 정도를 반영한다. 그 점에서 우리 사회는 많은 걸 이룩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공적 영역의 투명화가 진행될수록 사적 영역의 프라이버시는 더 보장돼야 한다. 민주사회의 토대가 개인의 자유란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개인에 대한 존중 없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창의적 인간과 사회가 되려면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개인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모순이다.”

-공인의 프라이버시 범위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별하는 경계선은 문화마다 다르다. 사르코지와 클린턴이 대표적 예다. 사르코지는 대통령이 된 뒤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그걸 보는 프랑스 국민의 태도는 사적인 문제이므로 공적인 문제와는 상관없다는 식이다. 반면 미국의 경우 청교도적 도덕의식의 뿌리가 깊어 공직생활 하는 데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중요한 것은 그 같은 경계선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공직자 재산도 프라이버시와 관련 있나.

“공직자 개인의 재산도 프라이버시의 주요한 요소다. 공직자 재산 형성은 공개돼야 한다. 재산 공개의 범위와 방법은 해당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반영하며, 사회적 공론과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할 문제다. 우리의 경우 공직에 진출하려는 사람들의 재산 형성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뤄지지 않았을 거란 국민적 의혹의 뿌리가 깊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우리의 효 문화는 긍정적 공동체주의 아닌가.

“독립한 자녀들이 부모님께 전화·방문하는 정도를 조사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절대 효가 강한 나라가 아니다. 추석과 설 명절로 면피하는 문화다. 내가 아는 한 외국인 교수는 90세 노모가 있는데, 한 집은 아니지만 같은 지역에 살면서 매주 한 번 찾아가 시장 보고 한 끼는 반드시 같이 식사한다. 그런 분은 우리나라 관점에선 분명 효자다. 그런데도 철저한 개인의식이 있다. 이처럼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 유대를 이룰 수 있는 방식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자식 관계를 프라이버시로 나누기 힘든 측면이 있지 않은가.

“가정이 변해 간다. 드라마에 많이 나오고 있듯이 이혼·재혼 가정이 늘고 또 인공수정 아기도 등장한다. 가족이 변해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자식 간에도 프라이버시가 있다. 그걸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는 사회·문화적 성숙도에 따라 달라진다. 자식이 삶의 방식을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됐는데도 자식이 하고 싶은 공부를 부모가 못 하게 하면 프라이버시 침해다.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염려하면서 조언자 역할은 할 수 있다. 그건 정도의 차이다. 내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를 정하는 권리도 프라이버시다.”

-서양 개인주의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개인주의는 나쁜 말이 아니다. 이기주의는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는 것이지만, 개인주의는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되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윤리적 태도를 지닌다. 서양은 철저한 개인주의에서 출발해 현재 공동체적 유대감의 의미를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반대로 우리는 철저한 공동체주의에서 시작해 민주화 과정을 거쳐 개인의 의미를 파악하는 단계까지 왔다. 단순히 서양에서 뭘 더 배우자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유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우리 스스로 바람직한 사회상을 그려보면서 민주적 공론과 사회적 합의를 이뤄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진행·정리=배영대·김진경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이진우 총장은 1956년생. 연세대 독문과 졸업.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에서 철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계명대 총장으로 있다. 우리의 오랜 전통인 공동체주의와 서구의 전통인 개인주의를 접목시키는 일은 그의 오래된 관심사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88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전개된 집단주의 과잉 양상을 경험하며 잡은 연구주제가 ‘권력과 자유’의 문제와 직결된 프라이버시다. 현실과 유리된 철학이 아닌 삶에서 녹아 나오는 철학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프라이버시는 사생활, 사적 영역, 사적 권리 등으로 번역이 가능하지만, 번역을 하면 단어의 원래 뉘앙스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냥 음역해 프라이버시라고 쓴다고 했다. 저서로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탈현대의 사회철학』 등이 있고, 번역서로 『책임의 원칙』『인간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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