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 문화

범선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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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느 조용하고 작은 바닷가 마을에 낡은 범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주인도 없는 이 배는 오래전부터 한 곳에 자리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부스러지고 허물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누군가가 그렇게 삭아 가는 범선의 모습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바라보기엔 안타까웠는지 틈나는 대로 조금씩 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우선은 배 위에 쌓인 이물질부터 말끔히 치우고 벗겨진 칠과 녹슨 쇠붙이를 열심히 문질렀다. 누가 봐도 혼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한사코 이 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용도 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 그의 모습이 딱했는지 이번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거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배를 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한눈을 팔고 말을 걸고 할 겨를도 없이 그저 닦아내고 고치는 일에만 열중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이 재미있게 보였는지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일에 합류했고, 이런 식으로 하나둘씩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결국엔 낡은 범선을 단장하는 일이 마을 전체의 관심사가 돼 버렸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에는 나이가 많아 혹은 이런 일이 서툴러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도 있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일을 거들기는커녕 방해가 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 모인 누구도 개의치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주려 했고, 일하는 방법까지 자상하게 일러줬다. 일이 커지다 보니 들어가야 할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형편껏 주머니를 털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사정이 있어 그 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제법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비용의 상당부분을 희사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일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즈음, 멀리서 들리는 소식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뉴욕에서 세계 범선 축제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회의를 했다. 회의에서 모인 의견은 처음부터 이 배를 고쳐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었던 만큼 축제가 열리는 뉴욕으로 범선을 가져가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곳에다 기증하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쓸모없이 버려졌던 유령선은 날렵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스스로 그 일을 성취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말로 하기엔 너무 벅찬 감격이었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진한 감동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은 이미 하나였고, 상대방의 눈만 들여다봐도 서로의 생각과 느낌이 가슴 가득히 밀려오는 듯했다.

오래도록, 너무나 오래도록 마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언제부턴가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차지해 버린 범선이 마을에서 나와 멀리 항해를 시작했다. 그 배에 온갖 정성을 쏟았던 마을 사람들은 고명딸의 손을 이끌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가는 신부의 아버지처럼 손수 범선을 움직여 뉴욕으로 향했다. 어느덧 범선은 항구로 들어서고 있었고, 축제에 참여하거나 구경하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은 그 아름다운 배를 향해 뜨거운 박수와 탄성을 보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범선 사이에 자리잡은 우리의 주인공은 드디어 닻을 내리고 짧고도 긴 항해를 마쳤다. 배를 두고 돌아서는 마을 사람들의 입가에는 한결같이 뜻 모를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만이 간직한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언젠가는 그들의 공동체를 지탱해 줄 신화가 돼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문화를 이야기하라면 늘 빠뜨리지 않고 보기로 드는 실화다. 요즈음과 같이 삶이 각박해지고 서로의 다른 생각들이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을 때 더욱 간절해지는 사연이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는 일이 다 이랬으면 싶다. 지역마다 열을 올리고 있는 그 많은 축제는 말할 것도 없고 놀이와 공연이 모두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요즈음 부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기업문화.정치문화라는 것도 이렇게 만들어 갈 수는 없는지 모르겠다.

홍승찬 한국예술종합대 교수.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