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명분과 실리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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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하지만 궁극적으론 실리론이 채택되게 마련이다. 현실 떠난 정책이란 설 자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명분론자들이 손해 볼 건 없다. 실리 쪽으로 결정됐으니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될 테고, 자신은 잃은 것 없이 강직한 사람이라는 걸 과시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욕먹고 골치 썩이는 건 실리론자들이다. 극단까지 갔던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스러기를 치우는 건 또 그들 몫이어서다. 명분론자들은 이미 손을 털고 또 다른 명분을 찾아 나선 지 오래다. 여론도 흔히 명분 쪽을 지지하기 쉽다. 역시 그게 정의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얼마 전 한 잡지에 썼었다. 다른 주제로 하던 얘기였는데 마치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예견한 것 같아 옮겨 적는다. 미제 쇠고기 탓에 시끄러운 요즘 우리 말이다. 누구는 그걸 먹으면 당장 광우병에 걸릴 것처럼 말하고 누구는 근거 없는 선동이라 말한다. 전문가들조차 양쪽으로 갈려 상반된 주장을 편다. 그래서 국민들은 혼란스럽고 혼란은 불안을 증폭시킨다.

여러 색깔, 여러 겹의 덧칠을 벗겨보면 결국 이런 주장들이다. 하나는 “값싸게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장점에 비해 먹어서 병에 걸릴 확률은 극히 낮다”는 거고 또 하나는 “국민 건강을 담보하는 일에 아무리 작은 가능성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둘 다 맞는 얘기다. 그러니 타협이 쉬울 리 없다. 앞쪽이 실리를 강조했다면 뒤쪽은 명분에 무게를 실었다. 뒤쪽의 목소리가 클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민 건강이라는 명분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그들 손에 촛불을 들도록 이끌었다. 걷지 못하는 소를 전기충격기로 찌르는 자극적 화면이 기름을 부었다.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쇠똥처럼 뭉개졌다. 미국과의 통상마찰이 우리 경제에 끼칠 심각성 따위는 씨알도 안 먹혔다. 수입 개방이 궁극적으로 한우농가의 경쟁력을 키운다는 주장은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사람 모이는 곳에 잡상인 꼬이듯 불순한 의도도 끼어들었다. 수입 개방 비판을 넘어 대통령 탄핵운동 같은 도를 넘는 정치공세로 옮겨 붙었다. 야당들은 이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어제까지 쇠고기 수입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재협상을 외쳤다.

실리론의 중심에 있는 정부의 미숙한 대처가 화를 키웠다. 정부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얼마 전까지 뼈 있는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다 30개월 이상의 쇠고기까지 수입하기로 입장을 바꾼 데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이었다. 그리고 충분한 설명과 정보 제공으로 국민의 불안을 풀어줬어야 했다. 그런 노력 없이 미국 사람도 먹는다는 말만 되풀이했으니 가뜩이나 구차해 보이는 실리론이 먹힐 리 만무했다.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을 어진 사람과 함께해도 정법(正法)을 모른다.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만 어진 사람을 가까이해도 정법을 안다. 혀가 국 맛을 아는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법은 국력 집중이다. 무익한 명분과 실리의 논쟁에서 벗어날 때란 말이다. 앞서 결국엔 실리론이 채택되게 마련이라고 썼다. 이번 역시 그러리라 믿는다. 국제유가와 곡물가 등 원자재 가격 급등이라는 파고 속에서 경제 활성화란 최우선 과제를 이뤄내려면 다른 수가 없는 까닭이다. 재협상은 현실적이지 않고 특별법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완벽한 검역시스템을 갖추고 원산지 표시를 속여 파는 행위를 근절할 수 있을지 그 방안 마련에 고심할 때다. 소모적인 국론 분열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나 말이다. 이제 국 맛을 아는 혀가 돼야 할 때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