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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과 이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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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금강산 바로 옆 북한 온정리에는 작은 시골 병원이 하나 있다. 온정 인민병원이다. 한때 소독약과 봉합사가 없어 간단한 수술도 못했던 곳이다. 남한에선 레이저로 간단히 끝날 백내장 수술은 엄두조차 못 냈다. 아말감도 부족했다. 주민들은 끔찍한 치통에 시달렸다. 보잘것없던 이 병원이 요즘 북한의 최고 병원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1월부터 2주일에 한 번씩 남한 의사 5명이 자원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남한에서 용한 의사가 왔다’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입소문이 났다. 지난 1년 동안 북한 주민 1000여 명이 다녀갔다. 어둠 속에 절망하던 백내장 환자 40명이 눈을 떴다. 신기하게 지켜만 보던 북한 의사들도 빠르게 남한 의료기술을 흡수했다. 지원 창구인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은 신이 나 병원을 키우고 수술실을 마련하는 데 3억원을 지원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쉬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의 태도도 달라졌다. 남한 의사들의 입경 수속을 신속하게 도와주고, “수고하십네다”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탈이 났다. 너무 잘한 게 화를 불렀다. 소문을 듣고 평양과 원산의 끗발 좋은 인사들이 밀려든 게 문제였다. 지난 연말에는 고위층으로 보이는 환자가 50명을 넘었다고 한다. 금강산 휴가를 핑계대어 남한 의사가 오는 시간에 맞춰 병원을 찾은 것이다. 그 직후 북한 당국이 갑자기 “더 이상 주민 치료는 하지 말라. 의약품만 지원해 달라”고 통제령을 내렸다. 4월 중순 이후 남한 의사들의 진료는 금지됐다. 남한 의사가 북한 주민을 치료하는 유일한 숨구멍이 막힌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재단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출범에 맞춰 남한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고 짐작했다. 그래도 칼은 북한 당국이 쥐고 있다. 재단 측은 할 수 없이 좀 더 큰 고성읍 인민병원을 지원하려는 계획도 연기했다. 북한을 다녀온 한 내과의사는 “급한 대로 맹장수술은 충분히 가르쳤다”며 한숨을 돌렸다. 산부인과 의사는 “한두 번 더 다녀오면 제왕절개 수술도 배워줄 수 있었는데…”라고 아쉬워했다. 치과의사는 “틀니가 없어 음식을 못 씹는 환자도 많았다”고 걱정했다. 재단 측은 제일 고통스러운 충치 환자를 위해 아말감과 석고부터 힘 닿는 대로 보내줄 생각이다.

북한 당국이 겨우 열린 숨구멍을 틀어막은 처사는 치사하다. 어디 충치가 이념 보고 생기는가. 못 먹어 생긴 백내장이 장막을 친다고 나을까. 북한 주민들의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냉랭해도 인도적 지원은 늘려가야 한다. 지금 국제보건의료재단에는 북한에 자원봉사를 가겠다고 신청한 의사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