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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몹' 탈 쓴 정치집회 씁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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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외계인이 나타났다!"

수십명의 사람이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고 땅바닥에 벌러덩 시체처럼 쓰러진 뒤 3분 후에 다시 벌떡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기 갈 길을 간다.

지난해 9월 20일 서울 명동에서 있었던 '플래시 몹(flash mob)'은 내게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그것은 몇년 전 LP판을 통해 제니스 조플린의 허스키 보이스를 처음 들었을 때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소름끼침이나, 남자 소변기를 거꾸로 걸어놓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마르셀 뒤상의 발칙한 상상력을 접했을 때의 두근거림만큼이나 신선하고 설레는 경험임은 분명했다.

플래시 몹이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e-메일이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연락해 특정한 일시.장소에 모여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약속된 간단한 퍼포먼스를 한 뒤 뿔뿔이 흩어지는 모임을 뜻한다.

형식상으로는 '게릴라적 전술'을, 내용상으로는 '초현실적 유머'를 지향한다. 즉 번개같이 모였다 지령대로 행동한 뒤 자발적으로 흩어져 버리는 통상의 형식은 가지고 있으되, 그 핵심은 역시 기발하고, 엉뚱하고, 유쾌한 상상력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일부 단체 사이에서 이러한 플래시 몹의 형태를 빌린 불법적 집회시위나 선거운동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집시법상 신고를 하지 않고도 깜짝집회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거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다수인이 공동으로 불특정 다수의 의견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위를 주관하기 위해서는 행사 48시간 전 관할경찰서 등에 집회 시위 신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플래시 몹은 '예술'에 해당돼 신고대상에서 배제되므로 플래시 몹의 형태를 띠면 신고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것이 이 같은 깜짝집회를 주최하는 사람들의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정치색을 띤 깜짝집회나 깜짝 선거운동은 '짧은 집회시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고하지 않은 짧은 집회시위'일지언정 플래시 몹은 아니다. 우선 기발하지 않다.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다. 망치로 뒤통수를 "꽝" 얻어맞은 듯한 당혹감과 5분 뒤 세상이 다시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뿐이다. 두고두고 생각만 해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경이롭고 전위적인 상상력은 없다.

특정 정치이념을 지지하는 순간, 특정 후보를 선전하는 순간 이것은 더 이상 예술로서의 발칙한 퍼포먼스, 플래시 몹이 아니다. 오히려 법망을 피해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을 하려 한다는 얄팍한 속셈이 드러난 것 같아 내심 씁쓸할 뿐이다.

진정 플래시 몹이라면 더욱 엉뚱하고 기발하고 발랄하여 도시의 일상에 지친 나 같은 소시민들에게 유쾌한 웃음과 신선한 자극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플래시 몹의 탈을 쓴 선거운동이나 정치집회라면, 적법절차에 따라 솔직하고 설득력 있게 시민과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

이지은 인천경찰청 경무과 경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