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프리즘] 미국 대선이 들춰낸 흑백차별 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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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지지자가 26일 인디애나주 앤더슨의 한 고등학교 구내식당에서 오바마와 악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티셔츠에는 오바마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미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2007년 12월 10일자)가 인쇄돼 있다. [앤더슨 AP=연합뉴스]

흑인인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달 미국엔 ‘선천적 결손증(birth defect)’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흑백 인종차별이란 태생적 결함을 안고 태어났다는 얘기였다. 그는 워싱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건국 이념인 자유·평등·인권이란 가치가 흑인에겐 오랫동안 적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간은 평등하다”고 했지만, 흑인 노예는 인간의 범주에 넣지 않았다. 그들이 1787년 제정한 헌법은 인구 수를 셀 때 노예 한 명을 자유인(백인)의 5분의 3으로 쳤다.

그러나 이제 법적 차별 문제는 많이 치유됐다. “나에겐 꿈이 있다. 내 자녀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리라는 꿈이 있다”고 한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꿈은 법과 제도상으론 거의 실현됐다. 흑인의 공직 진출도 대거 늘었다. 킹 목사가 암살당한 1968년 연방 상·하원 의원, 연방 대법관, 주지사와 부지사, 주 법무장관 등 요직에 진출한 흑인은 12명이었지만 지금은 52명이다. 68년 9명이던 흑인 연방 하원의원도 42명으로 증가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1기 땐 사상 최초로 흑인 국무장관(콜린 파월)이 나왔고, 집권 2기엔 흑인 여성(콘돌리자 라이스)이 뒤를 이었다. 민간 부문에서도 흑인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하는 흑인은 여전히 많다. 흑인의 평균소득은 백인의 4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겐 고등교육을 충분히 받을 만한 여유가 없다. 주류로의 진입과 상류 생활은 대다수 흑인에겐 지금도 꿈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흑인의 의식 속엔 좌절감과 피해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노예의 후손은 여전히 좋은 출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라이스 장관의 지적처럼 공정한 경쟁을 할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백인과의 관계에서 종종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

뉴욕 주 퀸스 지방법원은 최근 무장하지 않은 흑인 청년에게 총기를 난사해 숨지게 한 뉴욕 경찰 세 명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그러자 흑인들은 “KKK(흑인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던 백인 우월주의 단체)”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흑인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 건 법원조차 그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경찰의 총기 발사가 부당하다는 걸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법원의 판단이 법리적으론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백인 청년이 죽었다면 법원이 이랬을까”라며 본능적으로 비교하며 의문을 품는 게 흑인들의 정서다.

흑인은 민주당 대선 주자로, 피부색이 같은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천지가 개벽할 걸로 믿고 있다. 오바마에 대한 흑인의 지지율은 놀라우리만큼 높다. 22일 펜실베이니아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선 흑인의 92%가 오바마를 찍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이제 흑인의 표를 얻는 걸 포기했다고 ABC방송 등은 전했다.

흑인이 뭉치자 백인층에선 힐러리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백인의 63%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힐러리가 잘해서 백인의 지지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 흑인이 오바마로 몰리는 데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오바마와 힐러리가 4개월 동안 네거티브 경선을 치르면서 상대 인종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흑인과 백인이 늘어났다.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흑인을, 오바마의 정신적 스승인 제러미아 라이트 목사가 백인을 자극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오바마 지지자의 30%, 힐러리 지지자의 25%는 반대편의 주자가 후보가 되면 본선에서 찍지 않겠다고 말한다. 오바마 측에선 주로 흑인이, 힐러리 진영에선 백인이 그런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미 언론이 우려하는 건 민주당 경선이 건드린 인종 문제가 본선에선 더욱 커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특히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가 될 경우 공화당은 남부의 백인을 상대로 인종 카드를 쓸 것이라는 게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 등의 관측이다. 미 정치권이 외교의 중심 가치로 내세우는 건 ‘자유·평등·인권의 확산’이다. 그런 그들이 안에선 인종 간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미국의 ‘선천적 결손증’이 사라지지 않는 건 정치 탓이 아닌가 싶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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