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연의청와대리포트] MB가 비서관들에 밝힌 ‘VIP 모시는 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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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얼마 전 비서관회의에서 VIP 모시는 비법을 털어놨다.

“내가 현대그룹에서 CEO만 20년 가까이 했다. 어떻게 가능했겠느냐. 기업주인 정주영 회장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정 회장의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조용하게 찾아가 바로잡도록 건의했다. 정 회장이 판단을 바꾸면 ‘어! 회장님이 생각을 바꾸셨네’라고 모른 체했다. 정 회장이 주도적으로 잘못을 수정하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비서관들은 일할 때 나와 내 뜻을 정확하고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다른 자리에선 체험담도 소개했다. 정 회장이 공장을 시찰하면 이틀 전부터 현장을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공장 근로자의 더러운 장갑이 눈에 띄면 장갑을 어떻게 지급하는지를 미리 알아보는 등 예상 질문과 답변을 끊임없이 찾았다는 것이다. 파벌에도 엄격했다. 현대건설 회장 비서실엔 MB와 동문인 고려대 출신은 배제됐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그런 철저한 자세와 노력이 대통령이 된 노하우란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 큰 꿈을 못 가졌다. 초등학교 때 동네에 불이 났는데, 소방관 아저씨가 불 끄는 것을 보고 소방관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대통령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통령 되는 거 나는 별로 안 좋다고 본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 때가 오면 살아온 경륜을 다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도 ‘내가 하겠다’는 사람보다 ‘당신이 한번 하라’는 사람이 돼야 선진국이 된다. 난 기업 다닐 때 최선을 다해 기업 일을 했다. 서울시장 땐 또 최선을 다해 시장 일을 했다. 그러다 국가 분위기가 이렇게 되는 바람에 각오를 하게 됐다.”

이 대통령은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엔 회장이었다. 그런 ‘실세 CEO’도 VIP 앞에선 그저 2인자에 불과한 게 기업의 생리인 모양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누구나 2인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문제가 생기면 기술자든 책임자든 CEO든 한자리에 모여 해결책을 찾는 게 건설 현장이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 회의 때 “새 정부에서 토론은 완전히 자유다. 뒤에 있는 분도 발언권 있다”고 발언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꿩 잡는 게 매’ 방식의 기업 풍경을 닮았다.

역대 정권에선 정권 실세로 불린 2인자들이 있었다. 박철언, 김현철, 박지원, 386 참모들이다. 세를 모으기도 하고 실력도 과시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2인자가 되려면 그런 여의도 정치와는 접근법이 달라야 한다는 얘기가 청와대에서 나온다. 힘 자랑은 절대 금물이고, 무엇보다 일로 실적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이 대통령은 가까운 측근 한 사람이 마치 실세처럼 행동한다는 보고를 받자 “자꾸 띄워 줬더니 이 사람 안 되겠구먼”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최상연 청와대 출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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