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끊긴‘재담소리’되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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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재담소리’의 기능 보유자 백영춘씨. [사진=변선구 기자]

무당 신분을 숨기고 양반인 ‘장대장’의 부인이 된 ‘만신’이 앞을 못 보는 허 봉사를 찾아왔다. 아이가 몹시 아파 허 봉사에게 점을 봐 달라고 온 것이다. 허 봉사는 ‘아이가 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라 신풀이를 해줘야 한다”면서 음흉스럽게 만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다. 그러자 만신은 “아니, 감히 양반의 부인 엉덩이에다 손을 대다니!”라며 발끈하면서도 무당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들어내길 부담스러워 한다. 앞을 못 보는 한 봉사가 양반 집안을 비꼬는 내용인 것이다.

27일 서울 양재동에 있는 한 간이공연장. 백영춘(62)·최영숙(53·여)씨 부부가 ‘재담소리’ 작품 중 하나인 ‘장대장’ 타령을 연습하고 있었다. 백씨는 ‘허 봉사’ 역할을, 아내 최씨는 ‘만신’ 역할이었다.

‘재담소리’는 서울·경기 지역에 전해 내려온 민속극이다. ‘재주 섞인 말’이라는 뜻으로,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에 해학을 담아 익살스럽게 소리와 연극으로 풀어낸다. 지금으로 치면 개그 혹은 종합코미디라 할 만하다.

백씨 부부는 잊혔던 재담소리를 살려내 맥을 잇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노고를 인정받아 남편 백씨는 지난달 서울시로부터 무형문화재 38호(재담소리 기능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원래 백씨는 17세 때부터 ‘경기 민요’를 배워 판소리를 익힌 소리꾼이었다. 1997년에 제자이던 아내의 제안에 따라 잊힌 ‘재담소리’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어릴 때 익혔던 어렴풋한 공연을 떠올리고 토막 소리를 모으면서 복원에 나섰다. 재담소리는 1900년대 초 광무대 극장이나 원각사 등에서 막간극 형태로 유행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전승의 맥이 거의 끊긴 상태였다.

11년간의 복원 작업은 백씨에게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재담소리 공연을 위해 협찬자를 찾아다니다 사정의 여의치 않아 개인 재산도 쏟아 부었다. 부부는 서울 잠원동에 있던 집을 경기도 광주시로 옮겨야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백씨는 몸도 망가졌다. 현재 병원에서 수시로 신장투석을 받고 있다. 4년 전엔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그가 역할을 맡은 ‘허 봉사’처럼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예술의 아이러니일까. 그의 대표작인 ‘장대장 타령’ ‘장님 타령’ 두 작품은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이다.

“앞이 안 보이니 오히려 연기가 더 쉬워졌어요. 두 작품 모두 앞 못 보는 장님이 주인공이니까요.”

백씨는 이제 서울시로부터 매월 100만원의 지원금을 받게 됐다. 그는 “큰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의 고생을 인정받게 돼 보람을 느낀다”며 “항상 곁에서 도와준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부부는 다음달 23일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에서 열리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축제’에서 문화재 지정 이후 첫 공연을 한다. 7월 초에는 개인 공연도 열 계획이다.

서울시 이충세 문화재과장은 “전통문화의 보존뿐 아니라 문화 자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에게 지원금 외에 공연 개최도 도와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최선욱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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