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따로, 경기 따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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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28면

글로벌 증시가 지난주 신바람을 냈다. 기업실적 호조(어닝 서프라이즈) 덕분이다. GE의 ‘어닝쇼크’로 겁에 질렸던 미국에선 이후 인텔과 IBM 등 대형 기술주가 예상치를 뛰어넘는 성적을 공개하면서 시장에 안도감을 불어넣었다. 씨티와 메릴린치 등 금융회사들의 실적은 신용 위기가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고 있지 않느냐는 희망을 심어 줬다. 월가에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긴 터널에 끝이 보인다는 낙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형주의 깜짝 실적이 어어졌다. 삼성전자가 1분기에 2조10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연간 사상 최대 이익을 예고했고, 시가총액 상위 종목 대부분이 예상치를 웃도는 양호한 성적을 제시했다.

주목할 점은 양국 모두에서 거시지표가 악화하는 가운데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점이다. 미국에선 3개월 연속 고용이 감소했고 얼어붙은 소비심리도 풀릴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도 경기가 정점을 벗어나 하강하고 있다. 1분기 성장률은 3년여 만에 최저인 0.7%로 낮아졌고 소비·투자가 크게 위축됐다.

경기가 나쁜데 기업 실적은 좋아지는 아이러니는 두세 가지 요인으로 설명된다. 우선 글로벌 비중의 확대다. 미국엔 원래 다국적 기업이 많지만 최근 이런 경향이 더욱 강화됐다. 미국 기업의 해외매출 비중은 지난해 10%대 초반에서 최근 20% 가까이로 치솟았다. 브릭스(BRICs) 등 신흥 개발국가의 가파른 성장세와 달러 약세가 합작하면서 해외부문이 실적을 떠받친다. 내수를 기반으로 하는 소비재 기업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반면 자본재 위주로 해외 거래를 많이 하는 기술 기업들의 실적이 호조를 보이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한국도 비슷하다. 삼성전자나 현대차처럼 수출 비중이 높은 회사들은 중국·인도·중남미 지역에서 매출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경쟁국들의 통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이는 원화는 미국·유럽에서의 가격 경쟁력 강화와 환차익이라는 선물도 안겨줬다.

경제의 대표선수가 모일 수밖에 없는 증시의 구조도 한 원인이다. 브랜드 인지도와 기술력이 높은 대표기업들은 경기 둔화의 영향을 가장 늦게 받고 회복은 가장 빠른 경향이 있다. 불경기는 약한 경쟁자를 도태시켜 강한 기업들의 힘을 더욱 키우기도 한다. 외환위기 이후 체감경기는 나빠졌지만 대기업 실적은 고공비행을 계속해 온 한국 경제의 경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 시장의 관심은 당분간 우량주에 쏠릴 가능성이 크다. 시장 전체론 소비나 수출·성장률 등 경기 변수의 눈치를 보며 추가 상승 여부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조심할 것은 너무 앞서 나가는 투자다. 장이 오른다 싶으면 많이 올라 부담스러운 우량주보다 부품업체 등 주변산업에 눈길을 돌리는 투자자가 적지 않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이들 주가가 우량주를 따라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경기 악화에 버티는 맷집도 대기업에 비하면 한참 떨어진다. 아직 난기류가 곳곳에 잠복해 있는 상태에선 경비행기보다는 점보기를 타는 게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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