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선물, 빈티지 와인 어때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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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19면

“만일 행복한 결혼이라는 게 있다면 그 결혼은 동반과 사랑의 조건들을 거부한다. 그것은 우정의 조건들을 반영하려고 애쓴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 말이다.
한 달 전쯤 ‘와인 레이블 이야기’를 쓰는 김혁 관장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와인 빈티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결혼기념일’이라는 지점에 생각이 닿았다.

와인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때부터 매해의 연도가 카운팅되는 와인의 빈티지는 그 와인이 얼마나 오래 묵었는가도 알려주지만, 그해 포도 수확의 좋고 나쁨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 자동적으로 매겨지는 숫자가 있다. 몇 주년 결혼기념일. 그런데 이 숫자가 10을 넘으면서부터는 헷갈리기 일쑤다.
김혁 관장과의 이야기에서 결혼기념일이 불쑥 떠오른 건, 지난해 가을 우리 부부의 10주년 결혼기념일을 그 흔한 저녁식사 한 번 없이 썰렁하게 지나쳤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럴듯하게 폼나는 이벤트를 하고 싶은 욕심은 있으되 둘 다 주간지에서 ‘마감’이라는 짐을 지고 사는 부부인지라 적당히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고, 결국 과한 욕심은 실행되지 못할 바에야 ‘다음으로 미루자’로 결론내려진 것이다.

“동의는 했지만 그래도 서운하더라고요.” “결혼한 연도의 빈티지 와인을 구해서 한 잔 했어도 좋았을 텐데요.” 1997년도 빈티지 와인이라… 의욕이 불끈 솟았다. 술 좋아하는 나나 먹기는 하지만 술을 싫어하는 남편이나 10년 묵은 와인 한잔의 매력이라면 충분히 기념일을 기념일답게 보냈을 것 같다.

“지금 구할 수 있는 97년산 와인이 뭐가 있을까요?” 귀를 쫑긋 세웠지만 김혁 관장의 답은 허망했다. “사실 오래된 빈티지 와인은 비싸기도 하지만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국내에서는.” “관장님,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이어지는 김혁 관장의 조언은 이렇다. 우선 결혼한 그해의 빈티지 와인을 찾는 노력을 즐겨라. 끝내 못 찾더라도, 혹은 찾아서 천문학적인 액수 때문에 포기하더라도 부부가 함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며 공동의 화젯거리를 갖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둘째, 새로운 방법으로 빈티지 와인을 즐겨라.

결혼 10주년이 2007년도였다면 2007년산 와인 중 어떤 게 우리 부부의 색깔과 닮았을까, 와인 고르는 일을 즐기는 거다. “지금 결혼하는 분들이라면 올해의 좋은 와인을 한두 박스 저장해 두고 매해 결혼기념일마다 한 병씩 마시는 거죠.”

행복한 결혼이 사랑보다 우정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 돼도 괜찮을 것 같다. 좋은 빈티지 와인만큼의 향기와 빛깔만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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