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일본금융>中.아무도 책임안지는 풍토가 화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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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빨간 신호라도 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몇년전 일본을 풍미했던 유행어다.유명 탤런트인 비토 다케시(47)가 퍼뜨린 이말은 일본인의 독특한 집단심리의 정곡을 찌른 말로 우리나라에도익히 알려져 있다.
일본 금융가의 건널목에도 빨간 신호등이 켜진 지는 오래 됐다.위험하다고 경고하는 이들도 많았다.그러나 모두 함께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은 위험신호를 무시했다.그 결과 교통사고가 나기 시작했다.가벼운 접촉사고에서 시작해 대형 사고로 번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불과 8개월동안 5개 금융기관이결딴났다.부실채권의 규모도 최근 코스모 신용조합때 3천8백억원으로 불어나더니 이번에 효고(兵庫)은행 7천9백억원,기즈(木津)신용조합 6천3백억원으로 대형화하고 있다.
문제는 함께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에 일을 그르친 뒤에도 책임지려는 사람이나 기관이 없다는 것이다.시민.은행.정부당국.정치인이 한통속이 돼 일렬횡대로 행진하다 빚어진 사고이기 때문이다. 우선 은행과 예금자의 입장을 살펴 보자.은행의 「안전신화」를 굳게 믿는 일본의 고객들은 어느 은행의 예금상품이 보다 높은 이자를 주는지만 살피면 됐다.그나마 80년대 중반 금융자율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집에서 가까운 은행」이 유 일한 기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 파산한 기즈 신용조합의 경우 망하기 직전인 지난달까지도 연 2.7%의 고금리로 정기예금을 유치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일반 도시은행의 정기예금 금리(年 0.5~0.6%)와 비교하면 크게 높은 수준에 주목,고객들이 몰렸다.효고 은행은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계 최고 인기선수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郎.오릭스블루웨이브팀)선수 타율의 10분의1을 금리로 정한 「이치로예금」을 만들었다.타율이 4할대를 넘어가면 당연히 4%대의 치명적인 금리가 되는데도 도박을 감행했 다.
물론 고객의 은행에 대한 믿음은 중요하다.일본 대장성과 중앙은행(일본은행)이 효고은행과 기즈 신용금고의 처리방안을 한꺼번에 발표한 것도 파문을 일찍 잠재우려는 의도때문이었다.효고은행의 본점이 위치한 고베(神戶)市 상공회의소의 니시 카와 가쓰미(西川勝實.50)기획부장은 『나도 효고은행에 상당한 예금액이 있지만 인출하지는 않았다』며 『대장성이 도와주고 있으니까 괜찮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비교적 예금인출액이 적은 효고은행과 달리 오사카(大阪)에 위치한 기즈 신용금고에서는 1일까지도장사진(長蛇陣)이 이어져 총 2천9백억원 가량이 빠져 나갔지만이에 대해서도 『당국 따위는 믿지않는 오사카 기질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나올 정도다.
일본의 예금보험법은 형식상으로는 금융기관이 파산할 경우 1천만엔 한도내에서만 예금액을 돌려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금융기관이 경영내용을 비공개로 하고 있는 현실상 거액예금자에게책임을 묻기가 힘들어 이 조항의 적용은 향후 5 년동안 유보되어 있다.
서로 책임을 미룰 소지를 남긴 안이한 금융풍토를 조장해 온 금융당국이나 정치인들에 대해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책임의식이 너무 희박하다는 비판이 뒤늦게 쏟아지고 있다.
사태가 악화되자 대장상의 자문기관인 금융제도조사회는 지난달 29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풍토」를 불식시키기 위한 방침을마련했다.▲경영에 실패한 금융기관은 존속시키지 않는다▲해당 경영인은 퇴진시킨다▲주주나 출자자에게도 손해액을 부담시킨다는 것이 방침의 골자다.
그러나 「책임지는 풍토」로 가는 길은 험난해 보인다.대장성이불량채권 처리기간으로 정한 5년이내에 공식적으로 40조엔,최대1백조엔까지 거론되는 부실채권이 해소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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