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정부가 부추긴 '배째라' 신용불량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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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의 신용불량자 구제 대책 발표 후 빚을 안 갚겠다는 사람, 소위 '배째라'족이 늘고 있다. '빨리 신용불량자 만들어 달라'고 배짱을 부리고 '추가 탕감'에 대한 기대로 대출금 상환을 미루는 채무자가 늘어 금융기관이 골치를 앓고 있다. '갚을 의사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겠다'는 정부 의도와는 반대로 구제 대책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결과는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다. 그동안 '총선 직전 신용불량자 구제책이 나올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실제로 빚을 안 갚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 때문에 많은 전문가가 도덕적 해이를 걱정했다. 그런데도 이헌재 경제팀은 지난 10일 구체적인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일단 '구제' 방침부터 불쑥 발표함으로써 부작용을 키운 것이다.

물론 빚 몇십만원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젊은이들을 모른 체 할 순 없다. 400만명에 육박하는 신용불량자를 방치할 경우 예상되는 경제.사회적 충격을 감안할 때 구제책의 불가피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가 '1~2년만 갚으면 원금도 깎아줄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김으로써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 것은 중대한 실책이다. 대출 이자나 상환기간 조정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원금 탕감은 말도 안 된다.

개인 빚 문제에 대한 정부 개입은 신중해야 한다. 해결하기가 쉽지 않으면서 한번 물리면 끝내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농어촌 부채탕감이 대표적인 예다. 이번에도 경기 회복이 늦어져 신용불량자가 늘 경우 제2, 제3의 대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도덕적 해이부터 엄격히 막아야 한다. 정부는 '추가 지원이나 원금 탕감은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향후 심사 과정 등에서 이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빚 안 쓰는 사람, 성실하게 빚을 갚는 사람만 바보 되는 일이 생겨서는 신용불량자 대책은 성공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책은 결국 '총선용'이란 비판을 면치 못하고, 엄청난 국민 부담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