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50. 길 선생의 술버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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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길옥윤씨와 결혼식을 한 뒤 일본에 갔을 때의 필자.

1966년 늦가을 나는 길옥윤 선생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은 그해 12월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됐다. 서로 나이도 웬만큼 먹었고, 세상 견문도 충분히 넓혔으니 나름대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바쁜 스케줄과 주위 시선 때문에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결혼식은 원맨쇼의 대가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의 사회로 진행됐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애틀랜틱 시티에서 만나 열렬한 팬이 된 김종필씨가 주례를 섰다.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씨는 길 선생보다 겨우 한 살 위였다. 마흔을 갓 넘긴 때였기에 난생 처음 주례를 선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과 일본에서 귀국하면서부터 화제가 되었던 톱 가수와 작곡가의 만남, 그리고 결혼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뉴스거리였다. 세간의 이목을 끈 결혼식을 마친 우리는 신혼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일단 일본으로 갔다.

길 선생이 급작스럽게 귀국하느라 일본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그가 결혼 후에도 계속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기를 희망했던 터라 일본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새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8년 동안 일본에서 살아온 길 선생이 함께 음악 활동을 하던 동료들이나 지인들에게 피로연을 열어야 하는 사정도 있었다.

우선 도쿄에 작은 아파트를 구해 일본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서울 세검정과 도쿄 시내에 각각 신혼 집을 마련한 것이다.

길 선생은 매일 밤 지인들에게 피로연을 열었다. 그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밤이 깊어도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고 으레 2차, 3차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자정을 넘기면 피아노가 있는 작은 바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대부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이때부터는 이 자리가 언제 파할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앉아 있자니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노총각이 뒤늦게 장가 간 턱을 내자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제서야 나는 길 선생이 매일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베트남으로 떠날 때까지 그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셨다.

뜻밖의 모습을 보고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그의 음악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혹은 사소한 습관이나 버릇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것은 거의 몰랐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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