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그림을 그림답게 보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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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그림 속에 노닐다
오주석 지음,
오주석 선생 유고간행위원회 엮음,
솔출판사,
216쪽, 1만3000원

“초승달 지는 깊은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도포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긴 갓끈은 멋들어지게 어깨에 걸쳤는데 마음은 진작부터 초롱불 속처럼 뜨듯해서 발끝이 벌써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혜원 신윤복(1758∼?)의 ‘월하정인도’를 두고 오주석(1956∼2005) 선생은 이런 해설을 붙였다. 여인에 대해선 “아마도 함께 갈 낌새지만 안 그럴지 행여 알 수 없다”라고 썼다. 신문에 연재한 이 글을 보고 ‘망원경으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 취미’라는 독자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달의 모양으로 보면 그림 속 시간은 한밤이 아니라 새벽녘이 맞다는 지적이었다. 글 쓰기 전 이미 대전의 국립천문대에까지 연락해 초승달임을 확인했던 치밀한 저자였건만 그림 속 장면을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으로 고쳐 써야 했다.

“조각달이 낮게 뜬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마음은 여인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건만 발끝은 하릴없이 갈 길을 향하고 있다…한편 여인은 치마를 묶어 올려 하얀 속곳이 오이씨 같은 버선 위로 드러났다. 함께 갈 수 없는 길, 그러나 마음만은 님의 품 안에 있다”라고.

함께 나눠 더욱 즐거운 그림읽기 얘기다. 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연구원을 지내며 좋은 그림을 실컷 보고 연구한 저자는 대중을 위한 글쓰기와 강연에 힘을 쏟았다. 여러 직업군의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생활인이 체득한 지혜를 즐겨 받아들였다.

집이 더 이상 집이 아닌지 오래이듯, 요즘은 그림도 그냥 그림이 아니다. 부동산이고 주식이다. 생전에 오 선생은 이렇게 개탄했다. ”뛰어난 그림은 화가 혼자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인의 총체적 삶의 결정(結晶)이다. 다시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정말 훌륭한 예술품을 가질 만한가 하고….”

“달도 기운 야삼경,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 신윤복은 몽롱한 달빛 속 연인의 연정을 흐드러진 필치로 이렇게 적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135호 ‘월하정인도’다.

저자는 3년 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떴다. ‘미완의 대기(大器)’라며 그의 재주를 아쉬워한 지인들이 유고를 엮었다. 덕분에 그림을 그림답게 보는 책을 만났다.  

저자는 변상벽의 ‘모계영자도’에서 도타운 모정을, 이명기의 ‘채제공 초상’에서 한 나라 재상의 진실성을 읽는다. 그림이 정겨워 눈 씻고, 글이 절묘해 한 번 더 눈 씻으니, 마음이 한층 맑아진다. 빛나는 책은 독자들이 더 잘 알아본다.

그의 저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2』 『한국의 미 특강』 등은 예술서로는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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