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47. 흔들리는 여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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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곽규석<中>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필자와 길옥윤씨.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 ‘4월이 가면’이다. 얌전하고 숫기 없는 길옥윤 선생이 프러포즈를 대신해 만든 ‘4월이 가면’은 처음에 슬로 비긴(slow beguine)풍이었다. 슬로 비긴은 서인도제도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에 사는 니그로계 토인의 민속춤이다. 내가 탱고 풍이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하자 그는 흔쾌히 탱고로 다시 편곡했다.

길옥윤 작사·작곡의 ‘4월이 가면’은 주목을 받았다. 그렇잖아도 외국에서 활동하던 남녀 연주자·가수 커플로 관심을 모았던 터였다. 2개월 예정의 체류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으니 ‘4월이 가면’은 사랑한다면 가지 말라는 그의 진심을 담은 노래임에 틀림 없었다. 누가 들어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성미 급한 몇몇 매체에서는 길옥윤·패티 김의 결혼 임박설을 보도할 정도였다. 하지만 길 선생 본인은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다. 프러포즈나 다름없는 노래를 만들어 주고도 일체 함구하고 있었다. 나 역시 뭐라고 딱히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미국에서 가수로 성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노래만큼은 자신했는데 막상 미국에 가보니 체격도 성량도 훨씬 더 뛰어난 훌륭한 가수가 무척 많았다. 그들 틈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가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음악이었지만 나는 외국어로 부르는 노래였고, 아무리 열심히 노래를 불러도 그들을 흉내 내는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그들처럼 보이도록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 모양을 해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면 가수로서의 한계를 느낀 것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감성과 몸에 밴 습성, 그리고 그로 인한 문화적 차이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처음 미국에 갈 때만 해도 나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당연히 국제결혼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를 알면 알수록 국제결혼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현실은 영화처럼 낭만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결혼은 김치 냄새, 된장 냄새를 풍겨도 서로 흉이 되지 않을 우리나라 사람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게다가 한국에 와보니 미국에서와는 영 다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대스타 대우를 받았고, 어디서든 특별 대접을 해주었다. 고달픈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미국으로 굳이 돌아가야 할까 하는 갈등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막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건강이 많이 나빠져 언제 또 비슷한 상황에 처할지 모를 어머니와 다시 떨어져 사는 것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처 펼쳐보지도 못한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도저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자꾸 흔들리기 시작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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