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곳지금은>한국속 중국-인천 차이나타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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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인천시중구선린동 일대 차이나타운은 해방직후만해도 1만명이 넘는 화교와 중국요리점.상점들로 북적거렸던 인천시 최대의 번화가였다.그러나 지금은 몇몇 중국음식점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차이나타운의 쇄락은 60년대 화교들에 대한 잇따른 경제활동 제재조치와 80년대 이후 신포동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상권형성때문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중국인촌,즉 차이나타운이 이곳에 형성된 것은 구한말인 1885년.淸나라와의 통상조약 체결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주한대표로 부임할 때 따라 들어온 일단의 거상들이 이 지역에 커다란 점포를 열면서부터 조선 속의 최대 중국인촌으로 자 리잡기 시작했다. 1937년 中日전쟁후 상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만해도 청나라상인들이 주단.포목.의약품등을 들여오고 양곡류를 실어가는등 교역이 활발해 무역규모가 일본의 두배규모인 1백58만9천圓에 이르렀다.당시 중국이주민수가 인천인구(5만6 천여명)의 16%인 1만여명에까지 이르렀으며 선린동뿐 아니라 인근 경동.내동일대까지 중국인 상점들이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中日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줄어들기 시작한 화교수는 50년대 1천여가구에서,60년대 5백여가구,70~80년대 1백50여가구로 급격히 줄어들었다.90년대에 들어서는 1백여가구만이 차이나타운을 지키고 있을뿐 대부분의 화교들 이 대만이나미국.중국본토 등으로 뿔뿔이 떠나 현재는 썰렁한 분위기다.
현재 이곳에는 4대째 산둥지방 고유의 속이 텅빈 속칭 「공갈빵」을 만들어 파는 「풍미(豊美)」등 중국요리집 4곳과 중국풍건물의 구멍가게 1곳만이 남아 옛 차이나타운의 잔영을 드리우고있을 뿐이다.
鄭泳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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