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어떤삶을 살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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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어린 왕자는 별나라 여행에 나섰다.첫번째 별에서 어린 왕자는명령과 지시만을 내리는 왕을 만난다.왕은 하품하는 것도 지시하고,늙은 쥐 한마리의 생명에 사형을 내리거나 사면을 하기도 한다.어린 왕자는 황혼을 보기 위해 왕에게 해가 지게 해달라고 청한다.『흠 흠,오늘 저녁7시40분쯤이면 가능하다』고 왕은 위엄있게 말한다.어린 왕자는 하품을 한 뒤『어른들은 이상해』하며그 별을 떠났다.
두번째 별에서 그는 칭찬만을 좋아하는 허영심 강한 사람을 만나고,그 다음 별에서 술 마시는게 부끄러워 이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술꾼을 만난 다음,하늘에 있는 5억 몇십개의 별 숫자를 매일매일 수첩에 세어 은행에 맡기는 부지런 한 상인을 만난다.남에게 군림만 하는 권위적 인간,칭찬만을 바라며 허위주의에 사로잡힌 위선적 인물,술꾼의 향락적 허무주의,모든 것을 소유하겠다는 물질 만능주의…생텍쥐페리가 동화형식으로 쓴『어린 왕자』속의 일그러진 어른들의 모습속에서 오늘 우리의 자화상을 본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통계청이 작성한「통계로 본 세계와한국」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우리의 국력은 세계 12위이지만 생활수준은 32위로 나와 있다.경제 지표는 높아졌지만 삶의 질은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단적인 증거다.독 재와 혁명,쿠데타와 민중봉기라는 악순환의 연속이 우리의 정치상황이었고 지시와 명령으로 일관되는 권위주의 정치풍토는 지금도 뿌리깊다.
잘 살아 보자는 깃발만 보며 달려온 30년동안 1만달러 소득이라는 경제건설을 이룩했지만 그 때문에 잃 어버린 것,빠진 것,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다.너무 빨리 달려오다 보니 모든게 대충대충 겉치레여서 다리가 주저앉고 백화점이 무너지는 참담한 참사가 거듭된다.
먹고 살만해지니 향락과 소비는 급증하고 변태적 심야영업에 성폭행.살부(殺父)의 패륜이 난무하는 도덕불감증 세상이 되고 간암 사망률과 여자교통 사망률이 세계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긴다.남보다 앞서야 칭찬을 받는 세태가 되면서 출세지향주의가이 사회의 룰이고 모범이 되어 심지어「성공한 쿠데타」까지 면책권을 갖는 규범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지난 50년을 이렇게 살아 왔다면 앞으로의 50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지금과는 다른 삶의 양식이 요구되고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이 예상되는 대전환의 시대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국내외 2백여 철학자들이 모여 지난주「인간다운 삶과 철학의역할」을 토론했다.이제 철학이 관념의 논리가 아니라 현실속의 구체적 삶의 향방을 제시하는 학문이 돼야 할 만큼 이 사회는 철학 부재(不在)의 혼돈속에 있다.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문명패러다임이 전개되고 새로운 산업환경 과 국제변화 속에서 구체적삶의 방식을 제시하기란 철학자들에게도 난제(難題)일뿐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변치 않을 인류의 영원한 숙제가 있다.사람과 사람의 관계다.사랑과 미움,애정과 원한,나와 남,내것과 남의 것 이 갈등과 혼란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채 일상의 노예가 되는게 우리의 삶이 아니었던가.
몇푼의 달러를 더 번다고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없다.지금껏 살아온 삶의 목표와 가치를 수정하지 않고서는 삶의 질은 향상될수 없다.
어린 왕자는 일곱번째 별인 지구에서 지혜로운 여우를 만난다.
쓸쓸해진 어린 왕자는 여우와 친구가 되기를 청한다.『난 너하고놀 수 없어.길이 들지 않았거든.』여우는 거절한다.『길이 든다(Apprivoiser)는 뜻이 뭐니?』『관계를 맺 는다는 뜻이야.』어떻게 관계를 맺는가.한송이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아침이면 물을 주고 햇볕이 들면 고깔을 씌우고 바람이 불면 막아주듯 상대에게 정성을 쏟는 일이 관계의 시작이다.이렇게 길이들면들려오는 발자국소리만 듣고서도 여우는 어린 왕자를 알아채고,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밀밭을 보고서도 어린 왕자의 금발을 생각하며 가슴이 뛴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관계,애정과 정성을 쏟으며 맺어지는 인간 관계,이것이 이 사회에 필요한 삶의 질을 높이는 관계의 시작이 아닐까.가을이 오고 있다.나의 삶,나의 인간관계를 한번쯤되돌아 볼 때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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