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아내 발톱 깎아주는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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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마지막 주말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내 업무수첩의 매월 마지막 주말 날짜 위에는 항상 빨간펜으로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다. 바로 아내의 발톱을 깎아주는 날이다.

9년 전, 어느 눈 내리는 밤에 시작된 아내 발톱 깎아주기. 시작은 단순했다. 내 발톱을 깎다가 옆에서 곤하게 잠든 아내의 벗은 발을 보았던 것. 이불 사이로 감자 같은 발 하나가 쏙 나와 있었다. '내게 시집와 고생만 하고…'하는 애틋한 생각이 들어 꿈 속을 여행하고 있을 아내의 발톱을 깎아주었던 것이다. 아내의 발톱 깎아주기가 몇 번 반복되자 그 때부터 아내는 발톱을 깎을 때가 되면 으레 내게 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자연스레 따뜻한 대화 분위기로 이루어지곤 했다.

'아내 발톱 깎아주기'가 아내와 나를 연결해 주는 거미줄같이 끈끈한 한 가닥의 선이 되어줄 것이라곤 정말 처음엔 예상치 못했다. 부부 사이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신혼 초와 같은 열정을 간직하고 살기란 좀처럼 어려운 것. 몇년 전 나는 실직했다. 세상물정 모르고 서두르다가 논에 웃자란 피처럼 뽑혀져 보기좋게 제도권 밖으로 버려졌다. 그 많고 많던 주위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멀어졌다. 누구 하나 찾아와 '소주 한 잔 하지'라고 말하는 친구도 없었다.

옆엔 처음처럼 아내밖에 없었다. 물론 아내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옆을 지켜주고는 있지만 대부분 침묵시위를 했다. 부부 간의 대화가 줄어들자 부부관계도 자연 소원(疏遠)해졌다. 그 정적이 감도는 우리 부부 사이에 실낱같은 끈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아내 발톱 깎아주기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더디게 돌아오는 일이지만 우리 부부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것이었다.

오른쪽 엄지발톱을 시작으로 왼쪽 새끼발톱을 깎기 시작하면 아내는 새끼발톱 옆에 난 감꽃 모양의 작은 상처 속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 버리곤 했다. 어린 시절 강변 수수밭에서 숨바꼭질하던 이야기로 시작하는 아내의 사실적인 동화(童話)는 언제나 끝이 없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나도 강변 마을의 발가벗은 개구쟁이가 되어 강물로 뛰어들곤 했다. 나는 발톱 깎던 것을 잠시 멈추고 아내의 천진한 동심에 푹 빠져버렸다. 그러면 잠시나마 세상사를 잊을 수 있었다. 아내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면 자정이 가까워진다. 발톱 깎기를 끝내고 손으로 간단하게 발 마사지를 해 준다. 그러면 그 분위기는 이불 속의 따뜻한 부부관계까지 부드럽게 이어지곤 했다.

요즘처럼 힘들 때면 아내의 발톱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영양제라도 주고 싶다. 아내의 발톱을 매일 깎아줄 수만 있다면 매일 아내의 동화 속 이야기 마을 속에서 각박한 세상사를 잊고…. 하루 하루가 답답한 요즘, 내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은 아내의 발톱을 깎아주는 일이다. 천식.위장병 등으로 나보다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한 아내. 앞으로 나는 아내의 발톱을 몇 년이나 더 깎아줄 수 있을까. 아내의 그 발톱을 깎아주며 몇 편의 동화를 더 들을 수 있을까.

선단 (전북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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