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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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선생은 아리영의 손을 곧 놓았다.잡아서는 안 될 것을 얼른놓아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라산이 마지막으로 분화(噴火)한 것이 1005년이라니까 이 비자나무는 그 후에 싹튼 셈이지요.지금으로부터 8백년전이라면 고려시댄데,1202년 신종(神宗)5년에 탐라(耽羅)가 모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탐라」는 제주도의 옛 이름이지요.
섭라(涉羅).탐부라(耽浮羅).탐모라(耽牟羅)라고도 불렸지요.…그러니까 이 비자목은 그 모반을 본 역사의 나무라고나 할까요.
』 13세기말에 지어진 『삼국유사』보다 더 긴 역사를 살아온 나무라고 나선생은 덧붙이기도 했다.
손잡은 사실을 얼른 지워버리려고나 하듯 나선생은 애써 역사 해설에 열을 올렸다.
넘어지려는 사람의 손을 잡아준 것이 뭐 그리 켕기는 일인가.
행여나 닿을세라 조바심내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목장의 산장 서재에서 최교수가 마루턱에 걸렸을 때 남편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그대로 껴안고 키스했다.그리고 곧장 합환(合歡)했다.
석연치 않은 계산서를 보는 느낌이 들면서 아리영은 자신을 의심했다. -행여 남편에게 앙갚음하려는 잠재의식이 있는 것은 아닌가.그 대상으로 나선생을 잡으려는 것은 아닐까.
-그럴리가! 스스로 강력히 부정하면서도 자꾸 나선생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밤. 서귀포댁이 방안에 모기장을 쳐주었다.괘념할 일이 아니라는데도 말라리아가 돈다는 뉴스에 부랴부랴 옛 모기장을 꺼내놓은것이다. 몇십년만에 보는 풍경이 먼 릴리시즘을 손짓한다.
여름철 농장에선 늘 모기장을 치고 잤다.자락을 걷고 모기장 속으로 뛰어드는 놀이에는 왜 그런지 가슴 설레는 신비감이 있어몇번씩이나 되풀이하다 어머니께 야단맞았었다.
서귀포댁이 쳐준 모기장에서는 방충(防蟲)약초 향내가 풍겼다.
그 풋풋한 내음과 모기장의 푸른 빛이 깊은 숲 속을 방불케 한다. 혼자만의 은밀한 숲 속.
꿀벌떼의 닝닝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다.꿀을 탐하며 어지럽게날아다니는 소리다.
괴롭다.
미스터 조를 생각했다.그 모습 위에 나선생 얼굴이 포개진다.
나선생이 기거(起居)하는 사랑채엔 작은 스탠드 불이 켜지고 있다.책을 읽거나 글 쓰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도록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어 꿈을 꾸었다.
나선생이 아리영을 내려다보고 있다.아리영은 알몸이다.자세히 보니 나선생이 아니라 낯선 노인이다.아리영은 어느새 비천도(飛天圖)의 선녀와 같은 날개옷을 입고 있다.둘이 손을 잡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짙푸른 물 속에 커다란 물고기 가 헤엄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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