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原爆투하 50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일본 히로시마(廣島)방송국의 60대 女기자인 마쓰나가(松永)는 10여년에 걸친 오랜 취재끝에 1945년 8월6일의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를 완성해 88년 9월1일 방영했다.이 프로는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N HK가 즉각전국에 재방송한뒤 그해 방송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이 프로를 제작하던중 원폭당시 히로시마 통합참모본부 간부로 재직중이던 고종(高宗)황제의 손자 이우(李우)公이 출근중 상생교(相生橋)에서 폭격당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특히 李공이 죽자 뒤따라 할복자살한 부관(副官)요시나리(吉 成)가 중요인물로 부각돼 이 프로의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했다.원폭투하도,황족(皇族)의 죽음도 물론 이 프로의 핵심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 민족의 죽음에까지 의리를 지킨 한 일본인의 「훌륭한」 모습을 은연중 돋보이게 했던 것이다.
일본은 자기네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마땅한 응징을 받았다는의미가 있고,진정한 피해자는 우리 민족뿐이라 할 수 있는데도 히로시마 원폭의 최대 피해자는 역시 일본이라는 시각이 아직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단순히 인명피해라는 관점에서 최초의 원폭 희생자 18만명중 우리 민족은 4만명「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네들의 피해만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본인들은 아직도 적지 않다.
원인은 덮어두고 결과만을 내세우려는 돼먹지 못한 발상이다.『태평양전쟁은 그저 통상적인 한 전쟁에 불과했다』고 철석같이 믿는극우파를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의 논리가 좋은 본보기다.
원폭에 관한 최근의 저서들 가운데는 「열등감을 갖고 있던 트루먼이 자신이 겁쟁이가 아닌 것을 보여주려고」 혹은 「결과를 직시하지 않은 무의미한 대파괴」등 비판적인 내용들이 있는가 하면,「1억 전국민 총옥쇄(總玉碎)라는 슬로건을 내 세운채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원폭투하는 불가피했다」는 긍정론도 있지만 어느쪽이 옳든지간에 최대 피해자가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할 수 없는 진리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당시의 피해자 3만여명이 아직도 일본과한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2세를 포함한 8천7백여명이 국내에거주하고 있으나 일본도,우리 정부도 거의 돌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반세기의 악몽을 보상받을 길은 정녕 없 는지 답답하기만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