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46.제2회 응창기배 결승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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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승부세계에서 강자들은 대체로 동료들에게 「독하다」는 이미지를주게 마련이다.독하다는 한마디엔 강인하다,끈덕지다,무섭다,빈틈없다,징그럽다는 다섯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서봉수9단도 언제나 독한 사람으로 손꼽혀왔다.그러나 徐9단은『 독한 걸로야 조치훈이 첫째고 그 다음이 이창호지요.이름만 들어도 벌써 으시시하잖습니까』하며 껄껄 웃곤한다.
독한 사람을 만나면 겁나고 독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푸근하다.그게 승부사들의 생리다.93년3월9일 제주도에서 잉창치(應昌期)배 결승제1국이 시작되기전 서봉수는 긴장하면서도 약간은 푸근했다.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9단이 나이가 만 50세의 노장이라서가 아니었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武人)이 음풍농월하는 문인(文人)을 얏보는 심정이랄까.아무튼 상대는 조치훈이나 이창호 과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었고,그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기만 했다.
오전10시에 대국 개시.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착수가 선선하고신속했다.조치훈 같으면 고통속에서 바위를 쥐어짜내듯 둘 장면에서도 오타케는 「모양」따라 척척두어왔다.속기들은 대개 마음이 후한 법.「역시」하며 徐9단은 마음이 다시 한번 포근해졌다.덩달아 徐9단은 착수가 빨라졌다.형세가 슬슬 꼬이고 있었으나 「녹림의 고수」로 통하는 서봉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멋내기좋아하는 서생들은 처음에 그림은 잘 그리지만 세파의 쓴맛을 보면 곧 기가 죽는 법이니까.
그러나 중반에도,종반에도 바둑은 그 상태로 흘러갔다.드디어 역전불능의 상태가 됐을 때 徐9단은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것을 느끼며 문득 상대를 봤다.판에 몰입돼 있던 오타케9단도 서봉수를 마주 봤다.오타케 눈에선 승부사 특유의 형형한 안광이빛을 품었다.그의 눈빛에서 서봉수는 비로소 자신이 경솔했음을 퍼뜩 깨달았다.미학(美學)이니,뭐니 하는 것은 글쟁이들이 만든말이다.오타케는 그냥 승부사다.
1국에서 黑을 들고 7집차로 완패한 서봉수는 정통파의 위력을뼈저리게 실감하게 됐다.사실 두사람의 전적을 비교해보더라도 오타케는 모든 면에서 徐9단보다 앞서있었다.92년 국제대회에서 오타케는 9승1패로 승률 90%(서봉수 9승3패 )였고 국내타이틀도 41회(서봉수 23회)나 획득하고 있었다.
이틀후의 제2국에서 徐9단은 전략을 1백80도 바꿨다.권투에서의 풍차돌리기처럼 족보에 없는 수와 모양으로 인파이팅을 전개했다.상대를 땀냄새.살냄새가 물씬 풍기는 진흙밭 싸움으로 끌어들였다.그러자 오타케의 아름다운 감각은 길을 잃고 서봉수의 실전감각이 불을 뿜었다.오타케의 산뜻한 「능률」이 서봉수의 「생명력」앞에 꺾였다.서봉수 5집승.
상극의 두사람이 맞붙자 「계산」은 문제밖이 됐다.오타케 스타일로 판이 짜이면 오타케의 압승이고,서봉수 스타일로 흐르면 서봉수의 압승이었다.『초반이 승부다!』고 서봉수는 직감했다.상대는 역시 기분파였다.이 점에서 그의 예측은 옳았다 .그러나 상대는 무협지에 나오는 소림사 고수처럼 절정의 기예와 내공을 갖추고 있어 초반에 잘못되면 끝장이었다.두달후 싱가포르에서의 결전을 기다리며 서봉수는 6대4로 우세하다는 스스로의 진단을 슬그머니 5대5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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