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문씨 새작품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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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92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던 작가 박일문씨(33)가 3년만에 신작장편 『아직 사랑할 시간은남았다』(전2권.민음사)를 발표해 관심을 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80년대 운동권의 꿈과 열정에 관한얘기라면 이번 작품은 90년대 들어 방황하고 있는 운동권 사람들의 울분과 상처,반성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박씨는 『아직…』에서 수많은 후일담소설을 통해 미화되기만 했던 80년대를 대의를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시대이면서 동시에 이념의 그늘 아래서 무수한 자기 기만이 행해졌던 야누스의 시대로 그려내고 있어 흥미롭다.
박씨는 운동권의 인격자로 여겨지던 인물이 동시에 두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가부장적인 남성 특권을 교묘하게 누리고 있는 양상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또 대의의 이면에 정파간의 세력다툼과 개인적인 명예욕 경쟁이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됐는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은 80년대 운동권이었던 13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이들의 공통점은 80년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기력한 아웃사이더로 생활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
「석문청」은 타고난 유목민 기질의 소유자로 90년대 들어서도인간해방의 새로운 대안을 찾아 고민하지만 아무데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술로 나날을 보낸다.시인인 「성성」은 80년대 PD(민중민주주의)계열의 수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으나 광주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나중에는 수배중 방파제에서 의문의 실족사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학보사 기자였다 운동에 투신한「서화란」은 성성과 사랑에 빠졌다 버림받은 후 석문청과 연인 사이가 된다.남성의 폭력적인 성을 체험한 이후 레스비언이 된다.민청학련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김진수」는 90년대 들어서도활동을 계속하다 조작된 공안사건에 연루돼 투옥된다.변호사의 딸로 성성과 사랑에 빠졌던 「도두미」는 승려가 된다.CA(제헌의회)계열의 리더였던 「권기회」는 90년대 들어 사업가로 변신하지만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그들은 생활을 위해 자신들이 비판했던 자들의 편에 서기도 하고 경험을 팔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 순수한 열정을 불태웠던 80년대에 한없이 집착한다.이와함께 이념적 광풍에 휩싸여 무시했던 인간적인 가치들이 소중한 것이었다는 뒤늦은 자 각으로 깊은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갈등을 겪는 이들의 내면은 깊은 골이 진 80년대와 90년대의 불협화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씨는 이 같은 시대간의 불화가 뜻은 높았지만 편협했던 80년대식 합리주의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때 비로소 극복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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