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40. 미국에서 얻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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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에서 생일을 맞은 필자. 동료들이 태극기를 그려 넣은 케이크를 만들어줬다.

3년간의 미국 활동은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더라도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그 사실을 숨기거나 포장하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언제든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미국 진출이 성공적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No!’라고 대답한다.

그 곳에서 나 자신의 한계를 뼛속 깊이 느끼고 실감했다. 물론 내 한계뿐만 아니라 내 나라의 한계, 유색인종의 한계를 동시에 느끼기는 했지만 어쨌든 난생 처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무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하는 말처럼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깨달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고,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던 미국 활동을 ‘실패’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수없이 벽에 부딪히고, 좌절도 여러 차례 했지만 허송세월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내 자존심이기도 하다.

내 한계를 느끼며 배운 것도 적지 않았지만 미국 문화를 앞서 체험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많은 걸 얻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공연할 때마다 패티 김은 요구사항이 많고 까다로운 가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부정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충격적이라 할 만큼 앞선 선진국의 공연 문화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온몸으로 체험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억울한 오해 중 하나는 패티 김은 서구 지향적이어서 한국적인 문화를 싫어하는 가수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라는 무대를 지향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구 문화를 동경하는 평범한 20대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서구 문화를 동경하고, 미국에 대해 막연한 꿈을 꾸던 때였다. 미국 진출 기회가 생기면서 나는 오랜 꿈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결혼도 당연히 외국인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장 미국적인 도시, 뉴욕에서 내가 맞닥뜨린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고 견고했다. 비단 가수로서 무대에 서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문화와 습성 안에서 나는 영원히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더 높은 벽으로 다가왔다.

결국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내 나라의 언어로 된 내 나라의 노래라는 사실을 그 순간 느낀 것이다. 그 나라의 문화와 습성, 그 나라 국민의 정신세계에 100% 동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흉내일 뿐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앞선 나라의 공연을 먼저 보고 느낀 사람으로서 우리나라가 능력이 닿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몰라서,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못한 것을 한번 시도해보자고 권유했던 것일 뿐이다. 나는 오히려 속속들이 지나치게 한국적인 사람이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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