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총선이 보여준 무서운 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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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4·9 총선의 투표율은 사상 최저치인 46.0%다. 유권자의 반 이상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은 충격적인 수치다. 한나라당이 과반을 차지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국민의 4분의 1 지지도 못 받은 셈이다. 이슈의 부족, 정치권에 대한 무관심, 정당의 내분·공천 파동 등 여러 이유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의 민주주의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한나라당의 과반은 1988년 13대 총선 이래 집권세력이 의회 권력까지 차지한 두 번째 기록이다. 대부분의 정권이 실패했고, 4년 전 열린우리당이 탄핵 역풍에 힘입어 겨우 턱걸이 과반(152석)을 얻은 게 전부였다. 그나마 1년도 버티지 못했다. 그러므로 과반은 한나라당의 성공이자 무거운 짐이다. 민심은 한나라당에 힘도 실어줬지만 경고도 함께 했다. 152석을 얻었던 열린우리당 세력은 불과 4년 만에 70석 이상이 줄어들었다. 민심은 화나면 조련사마저 삼켜버리는 맹수와 같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선거 결과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승패에 담긴 민심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과반은 얻었지만 지난 대선의 압승에 비하면 세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한나라당은 민심이 냉정해진 이유를 살펴 향후 국정 운영에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민심이 이명박 대통령의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줬다는 얘기는 경제 살리기의 시대정신에 실적을 내놓으라는 명령이다. 대통령 권력도 줬고 국회 권력도 줬으니 이제 ‘발목이 잡혀서…’란 변명을 할 생각 말라는 주문이다. 집권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일단 밀어주고 나서 책임을 묻겠다는 측면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고, 물가를 잡고, 규제를 깨고, 세금을 줄이고, 공기업을 개혁하라. 이것이 민심의 제1 명령이다.

민심이 한나라당을 경고했다는 것은 이명박 정권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얘기다. 국회 과반 의석을 무슨 전리품인 양 여기는 자세,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면허증을 딴 듯한 행태를 유권자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을 얻었다곤 하지만 대선 때 득표율 기준으로 보면 200석을 얻었어야 했다. 방송사 출구조사의 160~180석을 얻으리라는 예측이 완전히 깨진 것도 민심의 저류가 이명박 집권세력의 일방 독주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운하 정책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낙선한 것은 정권이 이 정책을 강행해서는 안 되고 여론을 존중하라는 요구다.

집권세력의 독주라는 문제점은 당 공천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외쳤던 이른바 배신공천·파벌공천의 후유증이 개표 결과에 투영됐다. 오죽하면 이번 선거의 최대 이슈가 여야 대결이 아니라 여여 대결이라고 했을까. 수도권과 영남에서 교섭단체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박근혜 세력이 이명박 정권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가. 이 점은 이명박 정권의 안정성과 정계 개편 가능성까지 두루 함축하는 중대 문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과 당의 주류세력은 박근혜로 대표되는 비주류와 화합할 수 있는 정치력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통합민주당은 ‘잃어버린 10년’을 다시 한 번 심판 받았다. 제2당이 제1당 의석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박재승의 공천 혁명과 손학규·정동영의 희생 출마는 나름대로 감동을 줬다. 하지만 유권자가 국정의 실패를 잊기엔 부족했다. 뭔가 변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인 변신엔 실패한 것이다. 유권자가 통합민주당을 ‘도로 민주당’ ‘도로 열린우리당’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당은 변혁의 숙제를 안게 됐다. 민주당은 어떤 정체성과 어떤 노선으로 이 정권의 독주를 막을 것인가. 어떤 사람이 제1야당의 리더가 될 것인가. 민주당이 스스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들은 건전 야당의 역사적 책무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이회창 총재의 자유선진당은 대전·충남을 석권함으로써 그들의 희망대로 ‘충청도당’이 되었다. 보수의 분열과 함께 새로운 지역당의 출현은 한국 정치에 해묵은 숙제를 다시 던져 주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부진은 진보의 분열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다. 두 당과 창조한국당은 진보세력의 새로운 출발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