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목욕탕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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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형렬 (1954~)의 '목욕탕에서' 전문

따끔따끔한 탕 속에 들어가서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앞에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사람은 지난 12월 전방에서 제대를 했다. 대학에 떨어진 아이는 거울 앞에 앉아 다리 때를 밀고 있다. 옆에서 아이 시원타, 아이 시원타는 늙은이는 뼈가 녹는 모양이다. 좋은 아침, 해가 나서 새벽에 내린 눈이 얼어붙은 거리를 걸어갈 생각을 하니 즐겁다. 욕탕 밖이 환하다 (집은 봄처럼 창문을 환하게 열었겠지?) 천장 창 눈얼음이 햇살 이에 물린다. 부스러진다.



삶이 짜증스러울 때는 동네 욕탕엘 가자. 수증기가 뽀얗게 피어오르고 게르마늄인가 뭔가 하는 성분의 수포들이 보글보글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발갛게 보기 좋은 얼굴들. 처음 만난 이의 등도 밀어주고, 아이 시원타 아이 시원타 뼈가 녹는 할아버지의 겨드랑이 때도 따뜻하게 밀어주고, 그러다가 냉탕에 들어가서 아이처럼 첨벙첨벙 물장구도 치자. 좋은 아침, 새벽에 내린 눈 위에 햇살이 비치는데 욕탕 문 앞 아주 뚱뚱하고 착한 눈사람 하나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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