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염치라도 좀 차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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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네 사회에서 도덕이 실종되었음을 탄식하는 소리를 들은지 이미 오래다.그리고 도덕이 실종된 원인이 목표만을 중요시하고 과정.절차를 소홀히 했던데 있음도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우리네 사회에서 도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과정이나 절차를새롭게 다지는 자세부터 가다듬어야 한다는 처방도 내려져 있다.
문제는 허물어진 도덕이 바로 세워질 것 같은 기미라도 보이면,희망을 가지고 참으면서 기다리겠는데 아직 그러한 기미를 찾을길 없다.오히려 점점 더 허물어져가고 있는 듯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1992년 12월19일 눈물을 글썽이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사람이 한마디 변명도 없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나섰다.본인 스스로『약속은 못지켰지만 변명을 안하겠다』고 말하면서 정계복귀를선언했다.
돌이켜보면 눈물을 글썽이며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을 터인데,한마디 해명도 없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나왔으니,그때 흘린 그 눈물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인가.
원래 우리네 정치인들은 손바닥 뒤집듯 식언(食言)을 되풀이해온 것도 사실이다.
식언을 밥먹듯 했던 우리네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정치판에 대해국민들이 불신감이나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설사「변명은 안하더라도 사과 한마디쯤은 했어야 옳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구차스럽게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정계복귀라는 목표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라면,지난날 군부통치시절의 목표지향성(目標指向性)의 정치행태와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더욱이 정중히 밟아야 할 과정이나 절차를 다 무시한 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지난날 스스로 소속했고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던 그 정당의 지도체계를 깔아뭉개는 언동이나,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행태는어떻게 풀이해야 할는지 도무지 가늠이 서지 않는다.
거창하게 도덕을 바로 세우자고 얘기할 처지는 못된다.최소한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염치나 차렸으면 좋을 것 같다.염치란 주변의 눈치나 분위기를 살펴 남들이 눈살 찌푸릴 일쯤은 적어도 삼갈 때 비로소 차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네 정치판을 주름잡고 있는 사람들중 한사람은 군사쿠데타로 민주주의와 지자제(地自制)를 뒤엎고 등장했던 사람인데 민주주의를 새롭게 다지는 시점이나 지자제를 복원하고 있는 마당에 또다시 등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닐수 없다.그런가하면 나머지 두사람은 1970년에 「40대 기수론」을 부르짖던 사람들인데 2000년대까지 정치를 주도하겠다고나서니 정말 염치를 모르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정당한 명분이 없는데도 힘으로 신당을 창당하겠다니 실리를 좇아 허둥대고 줄을 서는 국회의원들의 작태 또한 한심스럽다.지금우리는 거창하게 정치도덕을 논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닌 것 같다.정치도덕보다는 낮은 차원의 염치를 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염치도 차릴줄 모르는 상황에서 정치도덕을 논하는 것은 과잉기대다. 우선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염치를 차릴줄 아는 분위기부터조성해놓고 난 다음에나 정치도덕을 논해 볼 수 있으리라.
우리네 정치상황,염치라도 차릴줄 아는 상황으로 이행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前성균관대총장.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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